Hyoung-Chan Kim
Korea University · Social Sciences
About the Lab
Professor Hyoung-Chan Kim's research lab specializes in Korean Confucian philosophy, particularly the intellectual history of Joseon Dynasty Neo-Confucianism. The lab focuses on the philosophical development of key concepts such as *li* (principle), *gi* (vital force), and *Cheon* (Heaven/Heavenly Mandate), with special attention to their metaphysical, ethical, and practical dimensions. Central research directions include the hermeneutics of virtue and self-cultivation in figures like Yi Hwang, Yoon Hyu, and Jeong Yak-yong; the transformation of transcendental concepts like *Sangje* (Supreme Being) within the *Li-Gi* (Principle-Matter) framework; and the ethical implications of *gongbu* (sincerity) and *gongshen* (reverence) in moral practice. The lab also explores the evolution of Confucian thought from Toegye’s rationalism to Seonghohakpa’s pragmatic ethics, emphasizing the dynamic interplay between metaphysical ideals and real-world moral action.
Research Overview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Selected Papers
15유학에서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연의 이치와 사회의 원리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통해 유학의 가치관을 설명하려 노력해 왔다. 특히 송대성리학 이래로 上帝나 天命, 天 등으로 표현되던 초월적 존재의 개념은 理, 太極, 道 등 원리ㆍ법칙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대체되어 왔다. 퇴계 이황은 理發, 理動, 理自到 등의 명제를 통해 理氣論 체계에서 理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天 또는 上帝에 대한 敬畏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理를 發, 動, 自到하는 ‘活物’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만한 실천적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황의 고민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活物로서의 理’는 이미 온 우주에 ‘流行하는 天命’의 함의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理와 天命(上帝)의 관계는 보다 명확히 설명될 필요가 있었다. 이황의 문제의식은 허목과 윤휴에게 이어져 理는 곧 인간과 感通하는 天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되었고, 이익을 비롯한 성호학파로 이어져서는 理氣 개념이 존재론
‘氣質의 변화를 통한 天理의 회복’은 유학 또는 성리학의 전통 속에서 욕망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제시된 방책 중 하나이다. 본 논문에서는 氣質의 變化를 핵심적 수양방법으로 삼았던 栗谷李珥 와 직접적인 天理의 體得을 학문수양의 중심에 놓았던 退溪李滉의 心 性修養論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성리학에서 氣質變化의 이론적 기반과 그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수양ㆍ공부론에서의 차이는 心, 性, 情에 대한 이들의 견해차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황은 성현들이 道心과 人心, 本然之性과 氣質之性, 四端과 七情으로 각각 구분한 취지가 무엇이었는 가에 주목하였고, 이에 따라 비본질적인 인심, 기질지성, 칠정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도심, 본연지성, 사단에 집중할 것을 주장하며, 이를 직접 인식ㆍ체득하는 방법으로서 敬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이이는 도심ㆍ인심,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사단과 칠정의 理氣論的구조에 초 점을 맞추고 理와 氣의 역할을 선명하게 구분함으로써 氣의 淨化를 통 해 理의 本然이 드러나
성리학의 이기론은 자연과 만물의 구조와 작용을 일정한 체계로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다. 그러나 그 이론의 역할은 ‘설명’에 한정되지 않는다. 유학 혹은 성리학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이상의 실천적 ‘구현’을 그 학문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성리학의 모든 이론은 사람들이 이 목표를 현실에서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기능해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이론체계의 논리적 정합성이나 내적 완결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면 이기론을 기반으로 한 성리학에서 천(天)이나 천명(天命) 혹은 상제(上帝)와 같은 개념이 있을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기론(理氣論)은 만물의 생성부터 운동, 변화, 소멸까지 하나의 완결된 체계 속에서 설명해 내는 이론 체계이지만, 초월적 존재로서의 ‘천’은 그 체계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황은 주자학을 계승하여 ‘리(理)’를 중심으로 한 이기론을 심화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천’(천명, 상제
권철신과 정약용은 ‘이황→윤휴→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흐름을 제시하였다. 논자는 이것이 퇴계학파로부터 성호학파 내 신서파의 형성으로 연결되는 학통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여기고, 이 중 특히 윤휴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논자는 이황의 말년 저술에서 ‘理自到’와 ‘敬畏의 대상으로서의 天’ 사이에 미완의 과제가 남겨졌다고 파악하고, 윤휴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를 추적하였다. 윤휴는 ‘格物’・‘物格’을 인식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감응・소통[感通]’으로 풀이함으로써, 이황이 강조하고자 했던 ‘理’의 活物로서의 함의를 살리는 한편, 理氣論 체계에서 ‘理의 작용’ 문제와 관련된 개념상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感通’의 대상을 개별 사물의 ‘理’만이 아니라 ‘天’까지 확장하였다. 또한 天에 대한 경외심이 유학의 이상을 일상에서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황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天이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畏天]일 뿐 아니라, 늘
정약용은 성리학에서 주장하듯이 인간이 선천적으로 부여 받은 순선ㆍ완전한 본성을 구현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도덕적 분별력을 가지고 이기적 욕망을 조절하며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神形妙合의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도덕성이란 완성된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삶 속에서 만들어 가야 하는 덕목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天(또는 上帝)이 인간에게 부여한 도덕적 본성[天命之性]이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嗜好라고 규정되었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삶이란 기존 성리학에서처럼 필연적이고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자율적 선택에 맡겨진다. 하지만 인간은 上帝를 늘 두려워하며 愼獨의 자세를 지키는 한편, 인간의 마음에서 道心으로 확인되는上帝의 뜻을 돌아보며 욕망을 조절해야 한다. 따라서 정약용의 性嗜好說은 愼獨의 대상으로서 上帝에 대해 外感할 뿐 아니라 道心을 통해 上帝에게 內應도 하며 욕망을 조절하고 도덕을 실천하는 효과적인 공부ㆍ수행의 방안이었다.
Yi Hwang was a Korean scholar who further developed Neo-Confucian-ism on the foundation of Zhu Xis philosophy. However, when some ofthe Neo-Confucian concepts and logic found in Zhu Xis philosophy areapplied to Yi Hwangs theoretical framework, the following problemsarise: (1) his emphasis on Xinjing fuzhu (Selected Scriptures on theMind-Heart with Notes) and personality cultivation is rather inclinedtowards Yangmings philosophy; (2) the concept of the issuance of idefies the very definition of i
退溪 李滉과 栗谷 李珥가 직접 참여했던 16세기 ‘四端七情論爭’은 조선의 학자들이 理氣心性論 관련 논의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는 조선유학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그런데 퇴계와 율곡, 그리고 이후 조선유학자들이 理氣心性論 논의에 집중하게 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건국 이래로 그들이 추구해 온 주자학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그에 대한 대안 혹은 보완책 모색이라는,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의 과제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주자학을 비판하며 성장한 양명학이 유행하고 있었고, 조선 지식인들의 철학적ㆍ이념적 반성은 그러한 양명학의 영향과 무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양명학은 강렬한 비판에 직면하였고, 조선유학은 양명학을 배제하고 이기심성론 논의에 주력하면서 독특한 학문적 기틀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논의 과정의 중심에는 양명학 비판에 결정적 역할을 한 퇴계가 있었다. 퇴계는 양명학의 학문적 성과를
정약용의 上帝說을 퇴계학맥의 主理論的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면서, 주리론적 사고를 논리적 극단까지 밀고갔던 기정진의 一元論的 理氣論과 정약용의 상제설을 비교 고찰했다. 이를 통해 주리론적 사고가 왜 이같이 두 갈래의 다른 길로 나아가게 됐는지 밝혔다. 인간들의 적극적 노력을 통한 사회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정약용은 자기완결적 질서인 ‘理一分殊’ 체계로부터 인간만을 따로 떼어내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능동적 실천을 이끌어 내려 했다. 나아가 ‘理’ 대신 ‘上帝’를 도입해 상제에 대한 경외심을 도덕적 실천의 추동력 및 사회질서 통제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이론체계를 구상했다. 한편, 성리학의 완결성에 대해 보다 강력한 확신을 가졌던 기정진은 ‘理分圓融的 理一分殊’라는 보다 자기완결적인 체계를 구상했다. 그는 이황이 주장했던 ‘理’의 능동성을 더 강화하고, ‘理一分殊’의 정합적 체계에 장애가 된다고 여긴 ‘氣’를 ‘理’에게로 환원시켰다. 이렇게 만든 보다 정
조선시대 서원의 역사에서 退溪 李滉(1501~1570)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의 서원은 周世鵬(1495~1554)의 白雲洞書院 건립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서원의 역할과 의의를 재천명하여 조선 서원의 발전 방향을 세우고, 서원이 국가의 공인을 받도록 함으로써 서원의 공적 위상을 확립한 것은 바로 퇴계였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하여 퇴계의 書院觀에 관해 철학적 관점에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재검토한다. 첫째, 퇴계가 서원의 기능 중 교육과 함께 祭享을 중시하게 된 것은 서원들의 건립과정에서 제향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사실 외에도, 天命·上帝에 대한 ‘종교적’ 敬畏의 자세를 강조하고 학문의 기본자세로서 敬을 중시했던 퇴계의 공부·수양론과 연관해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퇴계는 과거공부에 몰두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內聖外王이라는 유학 또는 성리학의 궁극적 목적에 비추어볼 때 과거공부와 도학공부의 관계를 대립적으로만 볼 수는 없
허목이 이황의 학문에서 주목한 것은 이기심성론보다는 덕성함양 또는 실천수양의 부분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천’에 대한 경외심의 측면이었다. 허목은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천’이 ‘천’과 더불어 ‘하나의 기[一氣]’이자 ‘하나의 존재[一]’인 인간과 늘 감응(感應)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고, 그 관계를 이어주는 방편으로서 경(經)과 예(禮)에 주목하였다. 성인이 ‘천’의 이치를 직접 체득하여 글로 남긴 것이 바로 경(經)이라고 생각했던 허목은 ‘육경(六經) 중심의 고학(古學)’을 지향하였고, 육경에서 문자로 표현된 ‘예’를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천’의 이치를 구현하며 사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특히 ‘천’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서 원칙과 규범을 세우는 존재로서 군왕의 역할을 중시하였고, 군왕 중심의 예치(禮治)를 통해 ‘천’의 이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바로 이황의 실천수양론을 바탕으로 예학을 탐구했던 정구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실질 지향의 학문’
退溪 李滉(1501~1570)의 理自到說은 理氣心性論에서 理의 역할에 주목했던 그가 말년에 『大學』의 “物格”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제기한 설이다. 그는 物格을 “사물의 理가 이르다[理到]” 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高峯 奇大升(1527~1572)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理到’보다 더 理의 역할을 강조하는 명제인 “理自到[理가 스스로(저절로) 이르다]”를 제시하였다. 퇴계의 입장 변화에는 格物/物格이라는 物理 인식 과정에서 마음의 역할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格物/物格의 해석에서 朱熹(1130~1200)는 마음과 物理를 인식의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하였고, 퇴계도 본래는 마음이 인식 주체로서 대상인 物理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주희에 대해 마음과 理를 둘로 나눈다고 비판했던 王守仁(1472~1528)은 사물을 意之所在라고 규정함으로써 사물을 마음이 지향하는 대상으로 한정하고, 格物을 마음의 理로써 사물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한 사회를 지식사회라고 한다면, 그 사회에서 개인 또는 집단의 주요한 판단·행위가 이루어질 때 그 원인을 인과적으로 추적해 들어갈 경우, 그 사회의 저변에 있는 일정한 지식체계가 핵심 원인 중 하나로 드러나게 된다. 조선에서 그 지식체계는 바로 조선유학이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은 조선유학이라는 지식을 기반으로 한 지식사회였다. 그리고 지식사회로서의 조선의 機制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사회의 현실 속에서 그 지식과 지식인이 어떻게 생산·재생산되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그 지식 자체가 논의되고 만들어지는 층위, 그리고 그 지식이 입법·제도화되는 층위, 그리고 그것이 집행·실천되는 층위와 일상에서 그러한 지식이 경험되는 층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식은 각 층위에서의 판단·행위가 늘 참조하고 기준으로 삼는 것일 뿐 아니라, 각 층위에서 그 영향력을 통해 그 지식을 구현해 나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지식사회의 기제는 바로 그러한 각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판단·행위의 원인을
안동 김문이 장기간 현실의 권력집단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념의 정당성 혹은 지식의 진리성 확보는 안동 김문 출신 지식인들의 지적 탐구와 논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지식의 진리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안동 김문의 중심인물은 김창협이었고, 그의 동생 김창흡과 손자 김원행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이 연관된 논쟁으로는 知覺 논쟁, 朴世堂의 『思辨錄』 논란, 人性物性論爭을 들 수 있다. 세 논쟁을 통해서 안동 김문은 자신들의 학문적 입장을 확립하고, 서인 노론의 이론적 대변자로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특히 인성물성논쟁을 통해 노론 내에서도 湖論계열과 다른 洛論으로서의 학문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이들의 학문적 입장은 특히 주희와 이이의 이론을 계승하되 퇴계학의 비판과 문제의식을 수용함으로써 서인 노론의 기득권에 기반한 유연성을 가지고 집권세력으로서의 포용력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간사회에서 한 사람의 자아가 영향력을 가지는 범위는 그가 가진 신체적 조건보다는 그가 주변의 조건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일정한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개인은 타자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신에 대한 자기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17~18세기 유럽에서 근대국가를 형성하면서, 개인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는 바로 그러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개인은 자신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재화와 자산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타인의 역량도 활용하며 자아를 확장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유학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성인 혹은 군자는 자연의 보편적 원리에 개인의 가치관을 일치시킴으로써 사적 개인이 아니라 자연법칙 수준의 사회적 공공성에 동참하여 공적 인재로 사회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아를 확대한다. 그 경우에 개인의 자아는 타인들까지 포용하며 사회 전체 혹은 자연 전체의 수준으로 확대된다. 근대사회의 자아 확
朱熹는 陸九淵 형제와 鵝湖에서의 회합(1175년, 46세) 이후에 자신의 공부가 道問學 방식에 치우쳐 있음을 반성하였고, 50대 후반~60대 초반 무렵에는 시력의 이상과 건강의 악화로 인해 道問學 방식의 공부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던 상황에서 尊德性 공부의 효과를 경험하며 그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왕수인이 『朱子晩年定論』을 통해 주장하듯이 주희가 만년에 도문학적 공부 방식을 버리고 존덕성 방식으로 전환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희 만년의 입장은 오히려 道問學과 尊德性, 格物窮理와 持敬存心, 理學과 心學, 또는 진리탐구와 마음공부를 견고하게 결합한 공부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주체인 마음이 자기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向裏[내향적] 공부[마음공부 또는 心學]와 외물을 대상으로 하는 向外[외향적] 공부[진리탐구 또는 理學]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진리 인식과 마음 수양이 진정으로 결합된 하나의 공부가 되려면 그 두 가지 공부의 관계가 단계적으로 설명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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