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yeon Oh
Sungkyunkwan University · Social Sciences
About the Lab
Professor Jeyeon Oh's research lab specializes in the historical sociology of education and political movements in South Korea, with a particular focus on the intersection of educational policy, state violence, and youth activism from the 1960s to the 1980s. The lab examines the formation of educational elites, the institutionalization of educational inequality through policies like the '8-hakgun' system, and the transformation of student movements from nationalist resistance to internal university democratization. It also investigates the role of state security apparatuses in shaping higher education and youth politics during authoritarian regimes.
Research Overview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Selected Papers
15이 논문은 197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 강북 소재 학교의 강남 이전의 실상과 성격,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강남 ‘8학군’의 특징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글이다. 1970년대 가장 먼저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한 학교는 1976년에 이전한 경기고등학교였다. 정부가 경기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킨 이유는 서울 강북 도심에 몰려있는 과밀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정부 정책에 따라 경기고등학교 이전 이후 강북 도심에 있던 여러 ‘명문고’들이 차례로 강남으로 학교를 옮겼다. 이들 학교들은 비록 정부 정책에 따라 강남으로 학교를 옮겼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최대한 많은 이득을 얻어내고자 노력했고 실제로 많은 특혜를 받았다. 반면 정부는 일관성 없는 편의주의적 행정을 자주 드러냈다. 결국 이러한 특혜와 행정편의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1980년 학군제 개편과 더불어 강남 지역에 ‘8학군’이라는 ‘교육특구’가 만들어졌다. 강남으로 이전한 명문고들은 ‘8학군’에 밀집하면
1968년은 세계적인 격변의 한 해였다. 그 격변의 중심에는 대학생들이 있었다. 1968년을 전후로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여러 국가에서 대규모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학생들의 거센 저항은 ‘스튜던트 파워’로 불리며 68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 글은 68운동의 중심이었던 ‘스튜던트 파워’가 당대 한국의 학생운동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분석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즉 1970년 전후의 시기에 한국 학생운동에는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학교 밖 정치적 이슈에만 관심을 보였던 이전 학생운동과 달리, 1970년 전후 한국 학생운동은 학교 안으로 눈을 돌렸다. 학생운동 세력들은 학생 자치에서 대안을 모색하고 학생 기본권을 신장시켜 학원 민주화를 이루려 했다. 이는 1968년 전후 여러 나라의 ‘스튜던트 파워’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외국의 ‘스튜던트 파워’ 사례와 달리, 한국의 학생운동은 대학 관리운영에 학생이 직접 참여하려 하지
한국의 고등교육은 1970년대 후반부터 급속하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9년에는 대학입학정원이 한꺼번에 5만 명 가까이 늘어났고, 곧이어 졸업정원제를 골자로 한 ‘7.30 교육개혁조치’가 단행되어 1981년 대학입학정원이 10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 이로써 본격적인 고등교육의 대중화시대가 열렸다. 이 논문은 1979년에 대학입학정원이 급격히 늘어나게 된 원인과 과정을 정리·분석함으로써, 한국 고등교육 대중화의 역사적 맥락과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발견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고등교육 대중화는 일관된 고등교육정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동과 압력에 떠밀려 이루어진 것이었다. 둘째, 박정희 정부의 대학 정원 정책이 일관성을 가질 수 없었던 근본 원인은 애초 정책의 초점이 교육 외적인 부분에 맞춰 있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7.30 교육개혁조치는 사전 준비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역시 교육 외적인 요인에 의해 졸속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본고는 동백림사건에서 아직도 논란이 되는 몇 가지 쟁점들을 짚어보고, 1960~70년대 공안사건의 흐름 속에서 이 사건의 역사적 위치를 찾기 위한 글이다.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는 동백림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은 주로 유럽에서 유학한 바 있는 교수나 학생들이 관련된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는 315명을 조사해서 6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간첩죄는 인정되지 않았다. 관련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1970년 말까지 모두 감형과 특별사면의 방식으로 감옥에서 나왔다. 유럽에서 귀국했던 사람들은 모두 유럽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에는 중앙정보부의 고문 및 재판개입 여부, 유럽 거주 사건 관련자들의 한국으로의 강제 귀국 여부, 실제 간첩사건인지의 여부, 그리고 이 사건과 1967년 6월 8일의 국회의원 선거 부정과의 관련 여부 등에 대한 쟁점이 존재한다. 2006년 국가정보원에 대한 과거사건 조사
한국 고등교육 초기 엘리트교육 단계에서 대학생들은 강렬한 엘리트의식을 갖고 있었다. 사회에 대한 비판과 참여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고 자신감도 충만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경제적 지위 상승의 욕구가 함께 놓여 있었다. 1970년대 중후반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대졸 출신 고급인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학력 간 임금격차가 벌어졌다. 그만큼 대학 졸업 학력의 가치는 상승했다. 이와 같은 학력주의 확산 속에서 고등교육은 대중화 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교육 대중화는 학력 불평등의 결과물이었다. 이때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대학생들의 엘리트의식 중 사회 비판, 참여, 정의에 대한 열망은 점차 약화된 반면, 경제적 지위 상승의 욕구는 학력주의의 확산으로 더욱 자극받았다. 1980년대 고등교육이 대중화 단계로 본격 전환된 이후 대학생의 엘리트의식은 사실상 사라지고 임금격차 역시 완화되었다. 하지만 학력이 가진 가치, 즉 학력주의는 강고하게 남아 학력
1965년 베트남전쟁에 전투병 파병이 이루어질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의 이슈를 그동안의 한일협정 체결 반대에서 베트남전쟁 파병 반대로 전환시키고자 베트남전쟁은 물론 미국을 직접 겨냥한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부가 ‘반공’을 앞세워 학생들의 파병 반대 움직임을 강하게 탄압하고, 위수령 선포 후 학생운동 자체가 크게 약화되면서 이 같은 학생운동의 이슈 전환은 실패로 돌아갔다. 1966년부터 박정희 정부는 참전 군인들을 위문하는 캠페인을 전사회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1969년까지 총 6차례에 걸쳐 대규모 ‘파월장병 대학생 위문단’을 조직하여 열전의 공간 베트남에 파견하였다. 대학생 위문단은 참전 군인 위문이라는 본래의 역할보다, 대학생들에게 베트남전쟁 파병, 나아가 박정희 정부의 조국근대화 사업의 정당성과 성과를 선전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부는 대학사회에서 베트남전쟁 파병 반대의 싹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동안 정권 존립 자체를 위협했
이 논문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활발하게 제기된 3.1혁명론 관련 연구들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번째 연구는 반북·반공의 냉전적 진영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과 법통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연구는 ‘혁명’이라는 정명(正名)을 회복하여 3.1운동의 위상과 의미를 강화하려 했다. 세 번째 연구는 3.1운동을 최근 ‘촛불’까지 이어지는 100년의 장기 혁명의 시작점으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3.1혁명론은 3.1운동의 역동성과 가능성을 온전히 담아내는데 있어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In the Korean society, discussions on the unification began to be actively developed, immediately after the April Revolution, in 1960. Consequently, some unification movement organizations were successively formed in each university, with the start of the ‘National Unification League (Mintongnyeon)’ of Seoul University, in November, 1960. Mintongnyeons in each university suggested a South-North Korean Conference of students and created the National Unification League of National Students, a soli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college festival, the flower of college culture, and student movement in 1960s, when student movement started in earnest. College festival that began in the late 1950s spread to almost every college in 1960s after the April Revolution. Students that established ‘student council’ as an autonomous organization after the April 19 Revolution actively promoted college festival pushing forward this student council. As the political satir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남한에서 3.1운동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 확인과 더불어 ‘남북통일’, 더 정확히는 ‘북진통일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소환되었다. 3.1운동 당시 일제에 맞서 투쟁했듯이 이제는 실지(失地)를 회복하고 동포를 구출하기 위해 ‘북한정권’과 ‘공산진영’에 맞서 투쟁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1959년 초 일본의 북한으로의 재일한인송환 계획이 알려지자 곧이어 맞이한 1959년의 3.1절은 이전과 달리 대대적인 ‘반일’ 캠페인의 무대가 되었다. 이는 이듬해인 1960년 3.1절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3.1운동은 ‘민주주의’와도 강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 3.1운동과 민주주의의 결합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3.1운동의 결과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했고,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 역시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민주공화국’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독재가 심화될수록 이에 맞선 민주화
2014년과 2015년 한국 현대사 연구의 특징과 현황은 다음과 같다. 한국 현대사 연구는 역사학계 이외에도 사회과학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덕분에 연구성과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본고의 검토 대상 논저도 여러 제한 사항에도 불구하고 700여 편에 이르렀다.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에도 불과하고, 해방 70주년, 한일협정 체결 50주년, 베트남전쟁 파병 50주년의 도래에 따른 관련 연구, 새로운 ‘냉전사’와 ‘평화사’에 입각한 연구, ‘소주자’, ‘난민 이주민’, ‘협동조합’ 등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 주체에 대한 연구 등 최근 한국 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특징과 경향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주년’을 맞이할 것이다. 또 그 ‘주년’들로 인해 많은 연구가 진행될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자신의 연구에 능동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냉전사’, ‘평화사’, ‘소수자’, ‘
전태일은 ‘노동 열사’와 ‘아름다운 청년’만으로는 불리지만, 이것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기독 청년’ 전태일은 그 중 하나이다. 전태일의 삶과 투쟁, 그리고 결단은 기독교 신앙을 떼어놓고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전태일이 분신이라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 과정과 이유, 그리고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 청년’으로서 전태일이라는 주체가 갖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모습과 그 질적 전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태일의 죽음 역시 기독교계의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특히 진보적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줬다. 앞으로 전태일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기 위해서는 ‘기독 청년’ 이외에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전태일의 다양한 측면들이 적극적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3.1운동과 4.19혁명을 두 축으로 하여 여기에 한국근현대사의 중요 사건들을 연결시키는 ‘계보학적 역사인식’이 강조되었다.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도 3.1운동의 계보학을 수용한 듯하였으나, 사실 이를 완전히 거꾸로 전유하여 3.1운동과 4.19혁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5.16쿠데타와 10월유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 민주화운동 세력 역시 3.1운동의 계보학을 적극 활용하여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섰다. 민주화운동에서 3.1운동의 계보학은 자랑스럽고 성공적인 역사이며 반드시 계승, 발전시켜야 할 자산으로서 ‘동학농민전쟁-3.1운동-광주학생운동-4.19혁명’을 위치 짓고, 대신 5.16쿠데타와 10월유신을 완전히 부정, 배제하였다. 1980년대는 두 가지 측면에서 1960~70년대의 3.1운동 기억, 특히 3.1운동의 계보학이 계속 이어졌다. 헌법개정 과정에서 3.1운동의 계보학이 여전히 중시되어 현
During the late Japanese colonial period, as Japan was put in a defensive corner in the war they had started, they sent even Joseon students receiving higher education out to the warzone. As a result, Joseon students went to the battlefield in January 20, 1944 wearing a Japanese military uniform. After liberation, those who had been student solders showed their collective memories. Right after liberation, they called themselves ‘victims of the nation’ or ‘champions of the nation’. However, after
이 논문은 1948년 제헌헌법 제정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부터 1960년 4.19혁명 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공화’라는 용어, 개념, 담론이 어떻게 이해되고, 또 각 주체들에 의해 어떻게 전유되었는지를 살펴본 글이다. 당대 가장 보편적인 ‘공화’ 이해는, ‘군주제 배격과 국민주권 지향’ 그리고 ‘냉전진영론에 입각한 반공주의적 공화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공화’의 기본적인 의미는 군주제 배격과 국민주권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정체의 지향이었다. ‘민주주의’와 결합한 이러한 ‘공화’ 이해는 제헌헌법 제정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한 ‘공화’는 ‘자유’와 결합하여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1950년대 한국 정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을 공화주의에 벗어난 봉건적 특권세력으로 공격하거나, 야당의 내각책임제 주장을 공화주의 중 가장 나쁜 것을 모방하려는 행태로 비판하였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공화’를 전유하여 야당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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