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mo T. A. Koo
Yonsei University
About the Lab
Professor Inmo T. A. Koo's research lab specializes in modern Korean literature, colonial-era literary discourse, and the transnational circulation of literary modernity in East Asia. The lab explores how Korean literary intellectuals in the early 20th century engaged with Japanese and Western modernist movements—particularly symbolism and free verse—while negotiating identity, nationalism, and cultural autonomy under colonial rule. Central to the lab’s work is the analysis of literary translation, national poetics, and the ideological construction of 'Korean-ness' in texts produc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Research Overview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Selected Papers
15주요한의 「日本近代詩抄⑴․⑵」(1919)와 황석우의 「日本詩壇의 二大傾向㈠」(1920)은 조선의 문학이 일본 상징주의 시, 나아가 근대 자유시 형성 과정을 거울로 삼아, 조선의 근대시 형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가운데 발표되었다. 이 두 편의 번역을 검토하는 일은 주요한과 황석우가 일본의 시인들 가운데에서 누구의 어떤 작품을 선택하여 번역하고 소개했는가를 통해, 그들의 일본 상징주의 문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시를 통해 ‘근대’ 혹은 ‘문명’을 향한 자기 발견과 자기 성장의 비전을 탐색하는 가운데, 일본의 상징주의 문학이 조선의 문학청년들에게 무엇을 시사했는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 두 편의 번역, 특히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1942] 작품의 번역은, 일본의 상징주의 문학이 조선의 문학청년들이 반드시 창작의 과정에서 체현해야 할 상징주의 시, 나아가 근대시의 중요한 요소를 시사했다고 하겠다. 또한 이러한 번역은 프랑스 상징주의와는
최남선의 국민문학론의 핵심은 시조가 조선심과 향토성을 표현한 국민문학의 중심 장르이며, 그러한 조선의 국민문학은 세계문학 일반의 수준을 지닌다는 그의 주장에 있다. 이러한 주장은 ‘시조’를 서양의 ‘Literature’나 ‘Poetry’의 동의어로 보고, 나아가 시조를 중국의 詩經, 萬葉集과 대등한 위치에 두고자 하는 인식으로부터 비롯했다. 또한 그것은 메이지기 일본 국문학의 ‘시이카’, ‘국민시가’ 담론의 발전과정을 참조한 결과이다. 그리고 최남선은 단군 중심의 역사학, 국토순례를 통해 얻은 단군 중심의 민족 이념을 백팔번뇌를 통해 문학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한 최남선의 시조는 민족적 동일성을 기억이 아닌 현존의 실체로 재현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최남선이 굳이 시조를 선택했던 이유는 바로 시조의 형식을 통해서 조선인이 단군 중심의 민족 이념에 자발적으로 복무하고 자신의 운명을 일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남선의 이러한 문학적 인식은 당시의 문학자들
1927년 이후 김억은 근대적인 자유시론을 전개하면서, 서정적 주체의 사적인 음성 혹은 내면과 판단이 아니라, ‘향토성’과 같은 조선인의 원초적인 공통심성, 그리고 그러한 심성을 공유하는 전근대적 구술사회의 항상성 속에서 민족의 실체를 현존하게 하고자 했으며, 결국 정형률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와 같은 김억 등의 국민문학론은 일본 다이쇼기의 근대자유시의 전개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특히 가와지 류코의 정음자유시론은 김억의 문학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김억의 문학론은, 1920년대 국민문학론의 시가개량의 논리가 하나의 민족 이데올로기임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의 향토성 개념은 국민국가가 부재한 1920년대 조선에서는 기의가 부재한 채 기표만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다. 또한 김억의 문학론은 ‘조선심’ 혹은 ‘향토성’, ‘민족성’, ‘국민성’을 둘러싼 외연이 아닌 그 함의와 직면해야 하는 순간에도, 그것을 이해해야 하는 방법까지 제국의 자기 규정과 자기
한국과 일본의 근대문학에서 엘렌 케이의 사상은, 근대적인 개인의 자아발견, 성장, 그리고 국민국가 형성과 사회개조에 공헌하는 문학적 담론들과, 이러한 이념에 근간한 문학작품까지 생산했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의 경우 외래의 지식, 즉 번역어로서 ‘연애’가 한국근대문학, 나아가 식민지 조선에서의 근대성의 특징적 국면들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시사한다. 그러나 인종개량을 위한 우생학적 연애론으로서 엘렌 케이의 사상은, 조선과 일본에서 1920년대에 이르면 연애지상주의의 논리로 뒤바뀐다. 이러한 사정은 무엇보다도 본래 엘렌 케이의 사상 그 자체에 내재한 문제점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조선의 경우 1919년에서 1920년에 걸친 식민지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고, 일본의 경우 메이지기의 이상인 문명개화론이 폐기되기에 이르렀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이 논문은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인 민족성 연구를 소개하고, 그 의의를 규명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다카하시 도루는 『조선인』(1921)을 통해 조선인 민족성을 정의하고, 그것을 개조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일본의 식민지 조선 정책에 기여하고자 했다. 다카하시의 조선인 민족성 연구는 조선총독부의 구관제도조사사업의 성과와 그의 초보적인 연구 결과에 근간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조선연구를 조선의 구술문화, 문학, 사상, 종교에 이르기까지 확장시켰다. 그러한 다카하시의 연구는 메이지 시기 일본의 국민성 연구, 19세기 초 유럽의 중국인 민족성 연구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문화본질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는 조선인 공동체가 역사 속에서 스스로 형성한 역동성을 고려하지 않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한편 다카하시의 조선인 민족성 연구는 1945년 이후 한국 국문학 형성기에도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조윤제는 다카하시 도루와 길항하면서도 한국인의 초역사적인 보
이 글은 근대계몽기 가사체 형식의 운문 양식이 잡가, 민요, 찬송가와 접촉하고 변용하면서 창가의 주된 형식으로 변용하는 양상을 규명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근대계몽기의 가사체 형식은 개인의 서정적 발화보다 공동체를 향한 국내외의 정세에 대한 정견(政見)의 피력이나, 문명개화론이나 국민국가주의 이념의 호소를 위한 공변된 발화의 양식이었다. 가사체 형식은 동시대 유행한 전통적인 음악이나, 외래의 음악 양식에 의해 가창에 적합한 형식으로 변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가사체 형식의 운문이 음악적으로는 실러빅 스타일의 한 도막 양식이나 두 도막 형식에 대응되고 흡수되는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사체 형식은 창가의 주된 형식으로서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가사체 운문 양식이 본래 글쓰기 주체의 정서, 사상, 이념을 제약 없이 서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학적 특징으로 인해 문명개화론과 국민국가주의의 이념을 정의, 설명, 전파하
1920년대 한국의 근대시는 ‘조선으로의 회귀’가 주조를 이루었다. 즉 조선이라는 지역과 조선문학도 근대문학과 세계의 중심이라는 신념이 점차 조선문학 내부에서 득세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중심으로서 서양 대 주변으로서 동양, 혹은 조선이라는 이분법에 근간한 로컬리티의 위계나, 이를 통해 형성된 심상지리의 탈구축을, 또한 조선이라는 지역의 재영토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에서 1920년대 한국의 시인들은 그 ‘조선’을 흔히 ‘어버이’가 계신 ‘고향’으로, 또한 스스로를 타향을 전전하다 영락하여 귀향한 탕자로 표상했다. 또한 그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의 감각을 통해 민족의 관념으로 나아갔고, 이를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저회의 정서를 극복하고 자기정체성의 감각을 회복하고자 했다. 나아가 고향으로서 ‘조선’을 도구적 합리성이나 탈마법화를 결코 경험하지 않은 특권적 지위의 공간으로, 심지어 반근대, 반문명의 거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인류의 구경적 의의와
1930년대 『별건곤』지를 비롯한 당시 저널리즘은 ‘유행소곡’ 혹은 ‘유행가’ 현상공모를 통해 선발된 작품들을 음반회사에 의뢰하여 유행가음반으로 발매했다. 이러한 현상공모들은 당시 이른바 ‘비속한 유행가요’의 개량이야말로 시인의 의무라고 여기고 있었던 문학계의 사명감, 문학인들로 하여금 유행가요 가사를 개량하도록 요구했던 저널리즘의 기대, 그리고 전문작사자가 없었던 상황에서 시인 작사자의 등장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었던 음반업계의 요구가 절묘하게 상응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 현상공모는 엄밀히 말해 1930년대 조선에서 ‘시’를 둘러싼 관념이 바야흐로 소수의 엘리트 독자만이 묵독하는 시각 매체의 예술이 아니라, 대중이 가창하는 청각 매체 예술로서 바뀌어 가고 있었던 사정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모집은 작품의 제제․수사를 비롯하여 형식이나 규모까지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이것은 가곡형식이나 유성기음반이라는 매체의 기술적 한계를 염두에 둔 조건이었고, 당시 현상공모에 응했던
이 논문은 그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김사엽이 경성제국대학 재학 당시의 민요조사(1935~1936)의 결과 보고서를 중심으로 민요조사의 실상을 재구하는 한편, 식민지 시기 민요 관련 논설과 해방 이후 국문학사 관련 저술들을 통해 민요연구의 관점․방법․이념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아가 김사엽의 민요조사와 민요연구를 통해 그의 구비문학 연구의 의의를 재검토 하고자 한다. 이 가운데 이 논문은 김사엽의 민요조사가 사실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조선문학전공 교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의 조선인 민족성론, 조선 구비문학에 대한 입장과 방법론을 따르고 있음을 규명했다. 특히 김사엽이 영남지역, 부녀자들의 민요를 조선민요의 전형으로 삼는 가운데 드러나는 원시주의, 문화본질주의가 사실은 다카하시 도루로부터 비롯한 제국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임을 입증했다. 또한 김사엽의 식민지시기 민요연구가 민요를 기원으로 한 조선문학의 통시적 서술, 조선인의 민족성 규명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그것
1930년대 이하윤은 100여 편의 ‘가요시’를 유성기음반에 취입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유성기라는 첨단의 음향과학기술에 힘입어, 인쇄된 문자텍스트의 한계만을 벗어나 음성텍스트로서, 또한 그 가운데 문학의 장르를 넘어서 다른 예술 장르와 제휴하는 가운데 현전했다. 이러한 이하윤의 가요시는 시가 비단 소수의 문자 해독자의 묵독의 형식이 아닌, 대중적 가창의 형식을 통해 향유되고 있었던 특별한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이하윤의 가요시 창작과 취입은, 1929년경부터 본격화한 음향기술의 혁신, 당시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한 미국과 일본 음반회사의 다국적 자본에 의해, 조선의 음악이 유성기음반 산업에 포섭되고 재편되었던 사정과 관계가 깊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이하윤의 가요시 창작은 근대기 한국의 문학이 음향매체와의 경쟁하고 협업하는 가운데, 근대문화를 형성하는 동력 가운데 하나였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하윤의 가요시 창작과 취입을 둘러싼 사정을 다시 검토하는 일은 바로 그러
이 논문은 우선 『만한철도창가』에 나타난 일본의 식민주의의 시선, 욕망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작품의 저자인 오와다 다테키는 조선 반도에서는 일본의 오랜 대륙진출의 열망과 흔적들을 통해, 식민지배 혹은 대륙진출이 일본의 역사적 운명임을 암시했다. 이를 통해 그는 근대 문명의 상징인 철도를 통해, 일본의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는 가운데, 조선과 만주의 선주민의 존재를 소거하는 한편으로 식민주의의 물질적 욕망과 환상을 한껏 드러냈다. 이러한 사정은 『대만철도창가』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식민지 철도창가의 공통된 국면임이 드러난다. 또한 『지리교육 철도창가』와 비교해 보면, 이 『만한철도창가』를 비롯한 식민지 철도창가란 근대 일본의 국민국가주의가 국경을 넘어 식민주의로 성장해 가는 장면을 확인하게 된다. 이로써 이러한 철도창가라는 양식은, 가상의 철도여행과 파노라마적 풍경의 체험을 통해 상상된 공동체로서 제국 일본의 심상지리를 표상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1930년대 이후 김동환은 그의 ‘속요’ 일곱 편을 유성기음반에 취입한다. 일찍이 그가 다양한 형태의 자유시 형식을 실험했던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러한 ‘속요’란 엄밀한 의미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시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작품을 쓴 이유는 그가 이른바 ‘가요운동’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동환은 일찍이 카프 회원이었던 때부터, 시와 음악을 결합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가요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러한 시를 대중적으로 보급하고자 했다. 그리고 오늘날 남아 있는 김동환이 취입한 3매의 유성기 음반은 바로 그러한 그의 이상이 실현된 결과이다. 그러나 실제 작곡되고 취입된 그의 작품은 문학적 성취도가 낮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엄격한 검열로 인해 당시 음반회사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실제 작곡된 그의 작품은 유행가이기보다 예술가곡에 가까운 것이어서, 당시 대중적으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한 사정으로 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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