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ehoon Hahn
Yonsei University · Economics, Econometrics and Finance
About the Lab
Professor Jaehoon Hahn's research focuses on asset pricing, corporate finance, and the interplay between financial constraints and investment behavior. His work explores how macroeconomic risks—particularly changes in credit and term spreads—explain cross-sectional stock returns, especially along dimensions such as size and book-to-market equity. He also investigates the role of debt capacity in pricing for financially constrained firms, drawing on theories of imperfect capital markets. Additionally, his research extends into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Confucian ritual studies in Joseon Korea, particularly the intellectual legacy of Toegye (Yi Hwang) and the scholarly contributions of Saek-jeong (Sahyeong).
Research Overview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Selected Papers
15Abstract This paper investigates whether the size and book-to-market factors of Fama and French (1993) proxy for the risks associated with business cycle fluctuations. We find that changes in default spread (Δ def ) and changes in term spread (Δ term ) capture the systematic differences in average returns along the size and book-to-market dimensions in the way that the Fama-French factors do: small stock portfolios have higher loadings on Δ def than large stock portfolios, while high book-to-mar
ABSTRACT Building on a model of corporate investment under collateral constraints, we develop and test a hypothesis on the differential effect of debt capacity on stock returns across financially constrained and unconstrained firms. Consistent with the hypothesis, we find that debt capacity is a significant determinant of stock returns only in the cross‐section of financially constrained firms, after controlling for beta, size, book‐to‐market, leverage, and momentum. The findings suggest that cr
This paper investigates whether the size and book-to-market factors of Fama and French (1993) proxy for the risks associated with business cycle fluctuations. We find that changes in default spread (Δdef) and changes in term spread (Δterm) capture the systematic differences in average returns along the size and book-to-market dimensions in the way that the Fama-French factors do: small stock portfolios have higher loadings on Δdef than large stock portfolios, while high book-to-market portfolios
조선시대 예학의 수준은 沙溪가 저술한 『상례비요』와 『가례집람』의 출현과 더불어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를 만큼 다른 차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사계의 예학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자료가 『의례문해』이다. 그런데 『의례문해』에는 아주 특별한 부록이 붙어 있다. 그것은 退溪의 예설을 모아 엮은 『상제례답문』을 겨냥해 저술한 「『상제례답문』변의」라는 글이다. 이 글은 사계의 예학을 논구하는 데 있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자료이다. 사계는 물론 그의 후학들까지 퇴계의 예설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예학 수준까지 폄하하는 듯한 말들을 서슴없이 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기조에도 불구하고 『의례문해』와 「『상제례답문』변의」를 분석해보면, 자신의 예학을 구축해가고 당시의 예학 수준을 제고해가는 데 있어서 사계가 퇴계로부터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의례문해』에는 퇴계의 예설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내용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의례문해』에 수록된 퇴계 예설
일반적으로 조선유학사에서 예학은 사계와 한강이 활동하던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화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16세기 퇴계 이황에 의해 조선 예학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처럼 퇴계는 조선 예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학과 관련한 저서나 편찬서를 남기지 않았다. 다만 『退溪先生喪祭禮答問』처럼 평소 문인이나 지인들과 주고받은 왕복서 중에 예를 주제로 한 답문들이 문인 또는 후학들에 의해 발췌ㆍ편찬되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퇴계가 예서를 남기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퇴계가 예서를 저술하지 않은 이유는 연구역량이나 수준의 문제라기보다 예서를 저술한다는 것에 대한 퇴계의 생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예란 사회적 규범과 일상의 양식을 규정한다. 따라서 이에 관한 논의를 저술로 남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矯俗의 의미를 가지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사회개혁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퇴계가 예와 관련한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은 이 부분
書院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은 講道(作人)와 尊賢(崇道)이다. 즉, 敎學공간으로서의 기능과 享祀공간으로서의 기능이 書院의 대표적인 기능이다. 하지만 그동안書院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敎學공간으로서의 書院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해 왔다. 이는 書院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인 講道(作人)와 尊賢(崇道) 중에서 전자에 편중된 것으로, 書院의 전모를 온전히 구명하기 위해서는 후자에 대한 연구 또한 활발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1549년 12월 退溪는 豊基郡守로 재직하면서 白雲洞書院을 賜額해달라는 주청을方伯을 통해 나라에 올렸고, 이를 계기로 이듬해 白雲洞書院이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書院인 紹修書院이 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賜額을 주청하기직전인 1549년 가을 退溪가 白雲洞書院에서 준행되어 온 기존의 享祀禮에 대하여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를 개정함으로써 書院享祀禮와 관련한 중요한 표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본 논문은 書院享祀
‘강학(講學)’은 학문적 내용을 강명(講明)하는 것이다. 그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고,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 훨씬 유효하다. 율곡은 책을 함께 읽고 의리(義理)를 강명하는 것이 강학을 하는 근본 목적이라고 했고, 퇴계는 의리를 강명하는 것은 결국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 서원은 강학의 이와 같은 의미를 의례화함으로써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갖는 학문적・실천적 중요성을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것이 이른바 ‘강학 의례’이다. 당대(唐代)에 장서(藏書) 기능으로 출발한 서원은 이후 강학(講學) 기능이 더해졌고 북송(北宋)시대에 향사(享祀) 기능이 더해졌다. 서원 향사 의례의 독자적 위상은 아무래도 남송(南宋)시대에 주자가 창주정사(滄洲精舍)에서 봉행한 석채의(釋菜儀)를 기점으로 형성되었다. 중국의 서원 향사는 공자(孔子)를 향사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한국의 서원 향사는 대체로 공자를 향사 대상으로
서원의 향사는 국학이나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을 기준으로 삼아 모방을 하면서도, 그 대상과 규모 그리고 의식절차 등에서는 융쇄(隆殺)의 차등을 견지한다. 특히 대상을 선정할 때는 이른바 신유학의 도통의식을 강력하게 반영하는가 하면, 의식절차에서는 훨씬 간소화한 방식을 채택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 서원향사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서원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퇴계 이황은 신재 주세붕이 제정한 백운동서원의 향사례에 대폭 수정을 가함으로써 조선시대 서원향사례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특히 제품의 진설과 의절의 진행과 관련하여 중요한 표준을 제시하였고, 제관의 구분과 수행조건 등에 대해서도 기준을 제공했다. 이후 조선시대 서원향사례는 이러한 퇴계의 작업결과물을 기준으로 삼아 계승과 비판 그리고 조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갔다. 조선시대 서원들은 자신의 위상을 향교(鄕校)와 향사(鄕祠)의 중간에 설정하려는 의식을 강하게 보여준다. 특히 서원의 향사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향교의 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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