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gdong Lee
Sungkyunkwan University
About the Lab
Professor Sangdong Lee's research lab specializes in medieval European history, with a focus on the social, religious, and economic impacts of major crises such as the Black Death and the Justinianic Plague. The lab investigates how pandemics, religious movements like flagellant processions, and hagiographic cults—such as that of Thomas Becket—shaped societal structures, collective psychology, and institutional responses in late antiquity and the early medieval period. Key research directions include the interplay between disease, violence, and social identity, particularly regarding minority groups like Jews, and the role of sacred relics and religious rituals in legitimizing authority and fostering community cohesion.
Research Overview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Selected Papers
1514세기 중반(본 논문은 신성로마제국의 경우에 집중하지만) 서유럽 사회는 흑사병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에 직면했다. 사회는 공포와 불안에 휩싸였고, 이는 유대인이 기독교도를 살해하기 위해 우물에 독을 푼다는 독극물 음모론의 생산과 유통으로 이어졌다. 이 음모론은 유대인 대량 학살의 명분을 제공했다. 음모론은 실재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인이 자백을 통해 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 아래에서 사회 구성원은 소수자를 타자로 만들고 희생양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는 뒤르켐과 지라르의 일반론적 입장을 적용할 수 있다. 셋째, 종교·심성적인 면에서 기독교 사회에 내재화되어 있던 반유대인 정서 역시 유대인의 음모론이 실재한다고 믿게 했다. 음모론 및 유대인을 대하는 태도는 계급(층)에 따라 달랐다. 각자의 이해관계 및 입장에 따른 것이었다. 민중 계급은 종교·심성적 맥락과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도시 엘리트 계급은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the flagellant movements by comparing the flagellants of 1260 and 1348-9. The flagellant movement originated at Pergia, Italy in 1260 spread throughout Italian peninsula and across Alps. The rapid spread of it was relevant to the eschatology having been influenced by Joachim of Fiore, and an attempt to seek peace. However, north of Alps the flagellants were different from those of Italy, which made them those who were dangerous to the Church as well as secular author
본 논문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 대한 살펴본다. 특히 유사 이래 최초로 발생한 팬데믹이자, 최초의 페스트 창궐이라는 관점에서 이 역병의 역사성을 검토한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6세기 중반 이후 2세기 동안 비잔티움 제국과 북아프리카, 레반트 지역, 소아시아 및 이베리아 반도를 포함한 지중해 전 권역과 갈리아 지역, 영국제도(British Isles), 사산조 페르시아 (혹은 중국을 포함하는) 등 광대한 지역에서 창궐했다. 전염의 확산 범위가 세계적이라는 점에서 이 역병은 유사 이래 최초의 팬데믹이며, 게다가 인간 사회에서 처음으로 창궐한 페스트였다. 이 역병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느냐는 논쟁적인데, 이와는 별개로 이 역병에 대응·반응하면서 사유‧관념 체계의 패러다임이 변화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348년 흑사병이 잉글랜드에서 창궐함에 따라 전체 인구의 1/3 가량이 감소하였다.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노동 인구의 감소를 의미하기에 사회·경제적으로 파장을 야기하였다. 이전과 비교하여 노동력의 희소성이 증가하여 노동자의 선택권 혹은 협상력이 커졌다. 임금 인상은 불가피하였으며 노동자의 이탈 혹은 이동은 거스를 수 없는 사회 현상이 되었다. 사회 기득권 세력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경제적 손실이었으며, 하층민에 대한 인신 구속력이 침해됨으로써 통치적 권위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본 논문은 이런 역사적 맥락과 관련하여 흑사병 창궐이 야기한 사회·경제적 변화, 특히 임금 상승의 문제를 논의한다. 이를 위해 우선 노동력 감소가 임금 상승을 야기했다는 ‘포스탄 모델’을 살펴보고, 흑사병 창궐 이후인 14세기 후반기 노동력 감소가 실제 노동력 시장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또 사회는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 알아본다. 이어서 포스탄 모델과는 다른 방식으로 임금 상승의 문
1818년 던펌린 수도원의 교회 건물에서 발굴 작업 중 주제단 앞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 유골을 검사한 조사관들은 유골의 흉부 부위에 톱질된 자국에 주목했다. 이는 심장을 사체에서 분리 매장한 브루스의 경우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유골이 발견된 위치가 브루스의 육신이 던펌린의 주제단 앞에 매장되었다는 바우어의 진술과 일치하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조사관들은 1818년 발견된 유골을 브루스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심장을 분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과 바우어의 진술에만 의거하여 그 유골이 브루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본 논문에서는 1818년 발견된 유골이 브루스라는 기존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것이 브루스가 아닐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브루스가 매장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를 제안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성 토마스 베켓 숭배 의식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특히 ‘베켓 성수’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베켓의 성혈을 물에 희석시켜 생성된 베켓 성수는 베켓의 기적 중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캔터베리 당국은 베켓의 기적을 수집하고, 전례서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베켓의 기적 중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킨 베켓 성수의 영험한 능력을 찬양했다. 그리고 베켓 성수는 캔터베리 엠플레를 통해 서유럽 기독교 세계로 유통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베켓 숭배 의식 또한 잉글랜드를 비롯한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본 논문은 1320년 작성된 아브로스 선언의 역사성과 현재성에 대해 논한다. 아브로스 선언은 스코틀랜드는 113명의 스코틀랜드인 왕의 통치만을 받아온, 즉 외국인의 통치를 받아본 역사가 없는 독립 왕국이며 로버트 브루스는 자신들의 왕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그의 정통성을 부각시킨다. 특히 ‘선언’은 로버트 브루스의 정통성 확보를 통해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꾀한다. 이런 면에서 ‘선언’은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후 ‘선언’은 민족 혹은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을 고양시켜야 할 때면 현실 사회로 불려나온다. 당대의 요구에 따라 현실 사회로 호출된 ‘선언’은 스코틀랜드는 113명의 스코틀랜드인 왕의 통치만을 받아온 독립 왕국임을 역설한다. ‘선언’의 역사성은 당대의 요구와 함께한다.
This paper aims to describe the origins of feudalism and its relationship with the stirrup controversy. Concerning the origins of feudalism, Lynn White suggested that the introduction of stirrup led to the significant changes in the methods of warfare and military organization system during Charles Martel's reign in the early 8th century. In other words, the use of stirrup contributed to increases in the power of cavalry soldiers on the battlefield, which eventually lead to the system of feudali
This study examines the range of religious, cultural, and political circumstances that influenced the historical shaping of inauguration/ coronation ceremonies in different medieval societies. After the Carolingian dynasty of the Frankish Kingdom in the mid-eighth century, the so-called Latin-Catholic tradition heavily influenced the inauguration/coronation ceremony and its tradition in western Europe. However, different forms of ceremonial traditions were structured and embraced by the inhabita
본 글은 잉글랜드 내 ‘기억의 장소’ 중 하나인 헤이스팅스, 그리고 그 장소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살펴본다. 헤이스팅스가 ‘기억의 장소’인 이유는 1066년 이 곳에서 잉글랜드와 노르만의 군대가 격돌했고, 이때의 승리를 발판으로 노르만인들이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를 정복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 글은 노르만인들이 어떻게 헤이스팅스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를 검토하고, 그럼으로써 기억의 장소인 헤이스팅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본 논문은 앵글로-색슨인의 브리튼 이주와 브리튼의 앵글로-색슨화에 대해 알아본다. 5세기 초 로마 군단이 철수한 후 브리튼은 군사적으로 취약했다. 이에 브리톤인은 픽트족의 침입을 자체적으로 방어하기 어렵게 되자 앵글로-색슨인을 용병으로 불러들였다. 용병으로 브리튼 땅을 밟은 앵글로-색슨인 무리는 픽트족 문제를해결한 후 브리톤인과 대결하여 점차 브리튼을 장악하였고, 결국 브리튼을 앵글로색슨화 하였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여러 논쟁점이 있다. 예컨대 브리튼으로 이주해온 앵글로-색슨인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으며, 또 이주자인 그들이어떻게 토착 브리톤인을 압도하여 브리튼 사회를 앵글로-색슨화하였느냐 문제가그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앵글로-색슨인의 이주과 브리튼의 앵글로-색슨화를 서사적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주요 쟁점을 논의한다.
던펌린 수도원은 스코틀랜드 파이프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스코틀랜드의 여왕 마가렛이 1070년에 설립했다. 그녀는 사후 던펌린에서 성인으로 숭앙받았고 1249년에 교황으로부터 시성 받게 되어 공식적으로 보편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시성 받은 성인은 그 위상에 맞게 새로운 성소로 유골을 옮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에 따라 1250년 성 마가렛의 유골은 새로 조성된 성소로 이장되었다. 콰이어의 주제단 앞에 위치하던 성 마가렛의 무덤이 1250년에 교회 건물의 동쪽 끝에 새롭게 조성된 성유물함 안치소로 옮겨진 것이다. 성인의 유골을 새로운 성소로 옮김으로써 성인 숭배 의식에도 변화가 왔다. 1180년 이후로 콰이어를 중심으로 거행되던 던펌린의 성직자 및 순례자들의 종교 행위 및 신앙 활동이 1250년의 유골 이장을 통해 성유물함 안치소로 이전된 것이다. 성유물함 안치소에 조성된 성 마가렛의 성소는 콰이어의 제한된 공간과 접근의 한계성을 뛰어넘음으로써 성 마가렛 숭배 의식을 번성시키는데 기여
본 연구는 흑사병의 병인에 대해, 즉 흑사병이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야기한 페스트인가에 대해 검토한다. 20세기 초반 이래로 흑사병의 병인은 페스트균이라고 널리 믿어졌다. 그럼에도 연구자들 사이에 다른 의견이 개진되기도 했다. 흑사병이 페스트라는 것에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연구자들은 1800년대 말 인도를 중심으로 창궐했던 페스트와 흑사병 간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확산속도, 사망률, 증상, 면역력, 매개체(쥐-벼룩) 등의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본 연구는 흑사병은 선페스트, 폐페스트, 패혈페스트의 형태로 발병했으며 이는 선페스트 중심으로 창궐했던 19세기의 말 인도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이 회의론자들이 지적하는 차이를 발생하게 했음을 논증한다. 또한 본 연구는 체외기생충설과 DNA 분석이라는 방법론적 접근을 통해 흑사병 병인에 대한 논의를 확장시키고자 한다.
본 글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기록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14세기 말 15세기 초 당대의 기록들에 주목한다. 특히 스코틀랜드 왕위를 물려받은 로버트 스튜어트에 대한 기록을 비교·분석한다. 당시의 기록물들이 로버트 스튜어트를 어떻게 서로 다른 시각으로 기술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기록자의 역사관/세계관에 따라 어떠한 ‘사실들’이 선택되고 배제되는지, 그리하여 ‘과거의 사실들’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여 기록으로 남겨질 수 있었는지 로버트 스튜어트에 대한 기술을 통해 살펴보겠다.
2006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성 안드레아 축일을 스코틀랜드의 공휴일인 뱅크 홀리데이로 지정했다. 중세 시대 이래로 성 안드레아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아 온 것에 대한 산물이었다. 중세 문헌자료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인들은 14세기 초, 잉글랜드에 맞서 독립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이미 성 안드레아를 왕국의 수호성인으로 인식하고 숭배했다. 이러한 사실은 몇 가지 의문을 야기한다. 14세기 이전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성 안드레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스코틀랜드에서 성 안드레아 숭배의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와 같은 의문을 바탕으로 본 글은 성 안드레아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Dive deeper into Sangdong Lee's research on Nubint
Open this lab's papers in the app to read with AI, summarize, and cite in your wri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