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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tae Kim

Sungkyunkwan University

About the Lab

Professor Yong-tae Kim's research lab specializes in Korean classical literature and intellectual history, with a particular focus on intercultural exchange, ethnic and civilizational discourse in East Asia, and the evolution of Confucian thought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lab explores how historical figures and literary texts reflect shifting perceptions of identity, 'barbarian' and 'civilized' (Hua-Yi), and cross-cultural relations with China, Vietnam, and Japan. It also investigates the role of education, literary salons, and political thought in shaping national and regional consciousness.

East Asian thoughtHua-Yi discourseConfucianism in Joseonintercultural exchangeclassical Korean literature

Research Overview

Papers
51
Total Citations
151
Papers (5y)
9
Primary Field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Publications per year (5y)
9total
2021
2022
2024
2025
2026
Citations per year (5y)
2total
20212022202420252026

Selected Pa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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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17 citations·2009
1790년 柳得恭이 만난 동아시아 -「熱河紀行詩註」의 분석을 중심으로-
김용태

1790년 柳得恭은 청나라 乾隆帝의 8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熱河와 北京을 다녀왔다. 유득공은 여행 기간 내내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사신들과 자유롭게 만나 교류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熱河紀行詩註』로 정리해 냈다. 오늘날 인문학계의 가장 큰 이슈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론’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열하기행시주』는 대단히 흥미로운 자료이다. 유득공은 중국에서 滿洲族, 漢族, 蒙古族 등등의 여러 민족을 만났다. 유득공은 그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華夷’의 관념을 그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매우 모호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華夷에 대한 기존의 관념은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편견과 오해를 낳고 있었고, 유득공은 이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편견과 오해가 실제적인 충돌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하였다. 유득공은 동아시아 여러 민족 간의 활발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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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15 citations·2010
애국계몽기 雲養 金允植의 사상과 활동
김용태

본 논문은 애국계몽기 운양 김윤식의 사상과 활동을 ‘동도서기론의 향방’, ‘학교 설립 운동’, ‘일본에 대한 입장’, ‘民에 대한 인식’의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그의 동도서기론은 사상적 변모를 거듭하여 제한적 서구 문물 도입론에서 한 걸음 나아가, 서양의 ‘道’까지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이른바 ‘信敎自由論’에까지 나아갔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서구 문물의 적극적 도입을 위하여 김윤식은 학교 설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도 밝혔다. 한편, 김윤식은 智島에 유배되어 있을 때 일본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반일감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친일적 노선을 걷게 되고 1910년 한일병합 정국에서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하였던 행적을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외세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했던 것은 ‘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였던 점에 그 근본적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3
Article|11 citations·2016
楓皐 金祖淳과 '북촌시단'
김용태

김조순은 19세기 전반기 서울 북촌에서 시회활동을 주도하였는데, 이 모임은 연속성을 가지고서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본고에서는 이 연속적 시회활동을 ‘북촌시단’ 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본고는 북촌시단에 대한 연구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북촌시단에는 당대 어떤 시회보다도 고위 인사들이 다수 참여하였고, 해외로부터 들어오는 학술과 문화정보를 얻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북촌시단은 당대 가장 중심적 시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조순은 직업적 전문시인들과 함께 시적 표현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러한 흐름은 김조순이 죽은 뒤에도 계승되어 북촌시단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앞으로 북촌시단이 통시적으로 변화되어 갔던 양상을 연구하고, 또 ‘남촌’, ‘동촌’ 등 당시 서울의 다른 곳에서 열렸던 시회들과의 비교 연구를 진행하게 되면, 조선후기 한시사를 보다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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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11 citations·2009
虛白亭 洪貴達과 초기사림파
김용태

이 논문은 洪貴達(1438〜1504)의 삶과 문학에 대한 보고서이다. 홍귀달은 생의 대부분을 관료로서 보냈으며 그의 문학도 그러한 관료적 삶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을 놓고 보면, 그는 ‘훈구파’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연산군의 실정을 대단히 매섭게 비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비참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갑자사화’도 그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만년에 이러한 강렬한 비판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金宗直, 曺偉, 金馹孫 등과 같은 ‘사림파’와 공고한 연대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측면을 놓고 보면, 그는 ‘사림파’다. 이러한 홍귀달의 특이한 삶의 양태는, ‘훈구’와 ‘사림’을 둘러싼 학계의 논쟁에 대하여 새로운 시사점을 주고 있다. 논쟁의 초점은 ‘훈구’와 ‘사림’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개념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홍귀달의 삶은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 시대정신의 변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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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10 citations·2006
李是遠의 士意識과 利用厚生의 논리
김용태

이시원은 강화학파의 중요한 일원이며, 병인양요를 맞아 순절하였던 역사적 인물이다. 그의 집안인 전주이씨 덕천군파는 당쟁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소외되어 있던 집안이었으나 이시원 대에 이르러 다시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문과에 급제한 이후 고위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하며 주로 지방관을 지내며 치적을 쌓다가, 철종 임금이 등극한 이후 형조이조 판서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병인양요기의 순절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이러한 장렬한 죽음을 감행하였던 데에는 견결한 사의식을 강조하는 강화학파의 전통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죽음은 당대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의 후손들에 미친 영향을 감안할 때 민족의식의 성장에도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이시원은 학문과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강화학파, 나아가 소론학파로서의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노론측으로부터 ‘사문난적’이라 공박받았던 박세당의 실학적 학문성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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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9 citations·2010
한국한문학 자료에 나타난 베트남 인식의 몇 가지 갈래
김용태

본고는 한국한문학 자료 가운데 베트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글들을 가능한 널리 수집하고, 이 글들을 분석하여 전통시대 한국의 문인들이 베트남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한국 문인들의 베트남에 대한 인식은 다음의 세 가지 경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첫째 중국의 華夷觀에 영향을 받아 베트남을 ‘오랑캐’로 인식하는 경우, 둘째 중국 북경에서 양국의 사신들이 만나 한시를 수창하며 중화체제의 형제나라로서 우호를 다지는 경우, 셋째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인식을 통해 화이관을 극복해 가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양상의 경우, 한국은 전통시대 지속적으로 화이관의 영향을 받았기에 베트남에 대해서도 중국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랑캐’로 규정하고 스스로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주체적 판단이 아니라 중국의 시각을 내면화한 것이었기에 불안한 측면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중국이 혹시 베트남을 한국보다 우대하지 않을까 항상 불안해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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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7 citations·2011
漂海錄의 전통에서 본 『海外聞見錄』의 위상과 가치
김용태

일본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海外聞見錄』은 宋廷奎(1656〜1710)가 1704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저술한 漂海錄이다. 『해외문견록』에는 17세기 초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제주에서 발생하였던 표류 관련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데, 기존의 표해록이나여타 자료에 보이지 않는 정보가 풍부히 담겨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예를 들어, 1611년에 발생하였던 이른바 ‘유구(오끼나와) 왕자 살해설’과 관련해서는, 베트남에서 일본 측에 보내는 외교문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외교문서는 다른 어느 자료에서도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또 1653년 발생하였던 ‘하멜 표류’와 관련해서는, 송정규가 제주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하멜 일행의 무기류를 직접 살펴보고 그 특징을 자세히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이 또한 『해외문견록』에서만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밖에 『해외문견록』는 중국 선박의 구조에 대한 치밀한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고,중국 남부, 베트남, 일본, 대만 등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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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6 citations·2012
開港 이후 동아시아 漢文네트워크에 대하여
김용태

본 논문은 개항 이후에도 동아시아에는 한문네트워크가 활발히 작동하였음을 확인하고, 앞으로 한문학계에서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환기하기 위해 집필되었다. 일반적으로 한문은 근대의 시작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개항 이후 동아시아의 인적 교류가 이전에 비해 더욱 활발해지면서 동아시아인의 소통수단으로써 한문은 매우 광범하고도 요긴하게 활용된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근대에 한문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黃遵憲의 續懷人詩’, ‘姜瑋의 海外 體驗’, ‘壬午軍亂期 朝淸人事의 만남’, ‘金允植의 日本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개항 이후에도 동아시아의 상호 소통에 한문이 활발히 쓰였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 네 가지 국면은 최근의 연구사를 수용하면서 필자가 이에서 조금 더 나아가 살펴본 바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개항 이후 동아시아 한문네트워크의 존재를 대략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네

9
Article|5 citations·2017
菱洋 朴宗善의 에 대한 일고찰
김용태

燕巖 朴趾源의 <菱洋詩集序>는 독특한 문예미를 지닌 비평문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정작 『능양시집』의 존재여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늘 궁금증의 대상이었는데, 최근 성균관대학교에서 『능양시집』을 입수하여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菱洋 朴宗善의 시세계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시급히 제기되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박종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고 판단되는 <金剛百論藁>를 분석함으로써 논의의 물꼬를 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종선은 시를 구성하는 솜씨가 매우 빼어난 시인이었다. <금강백론고>에 실린 100편의 시는 모두 시적인 긴장과 흥미를 지닌 작품이었다. 그리고 작품의 성격이 매우 다채로웠다. 번거로울 정도로 고증적 서술이 이루어지는 작품도 있고, 간결한 언어표현을 통해 감각적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작품도 있었는데 이러한 점은 박지원이 <능양시집서>에서 비평한 내용과 유사하였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불교에 대한 친근감이 드러나 있어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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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5 citations·2003
玉垂 趙冕鎬의 ‘紀俗詩’ 연구
김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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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5 citations·2020
19세기 중후반 서울 문단의 여성 인식 –조면호와 박영보의 경우를 중심으로
김용태

19세기의 사상과 학술 그리고 문학은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서양 세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19세기 문학사에 부정적인 측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 나가는 흐름이 존재하였다. 19세기 전반기에는 여성 성리학자들에 의해 ‘하늘이 인간을 낳을 때 남녀를 차별하지 않았다’는 명제가 제시되어 남성 성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여성 예술가와의 진정한 결연을 고대하는 풍조도 남성 문인 사이에 유행하여, 여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19세기 중반으로 계승되었다. 조면호는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극심한 가사 노동에 시달리고 있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남성들은 염치없게도 고마워할 줄 모른다며 통렬하게 반성을 하였다. 또 박영보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인식은 아무런 자연법적인 근거가 없으며 다만 인간이 만든 문화일 뿐이라는 탁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여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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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4 citations·2013
貞山 李秉休 시문학에 대한 일고찰-시인적 면모와 학자적 면모의 관련양상을 중심으로-
김용태

본고는 李瀷의 조카이자 수제자였던 李秉休(1710∼1776)의 시문학에 대한 재검토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병휴의 시문학을 ‘담담한 학자풍의 시’로 이해하였으나, 사실 이병휴는 시에 대한 열정이 매우 컸으며, 참신하고 아름다운 시를 짓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점을 논증하였다. 그런데 이병휴의 시에 대한 열정은 그의 깊은 학문과 연결되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참신하고 주목할 만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첫째, 그의 세심한 관찰이 생명존중사상과 결합하여 微物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름다운 生態詩를 산출하였다. 둘째, 사회제도에 대한 관심이 시로 표출되어 「職掌八咏」이라고 하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였다. 셋째, 『周易』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시로 표현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러한 이병휴 시문학의 성취는 近畿南人들의 문학적 전통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본 연구는 근기남인들의 문학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에 하나의 밑바탕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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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4 citations·2002
침溪 尹定 의 문학활동 - 여항·서얼·서북지역 문인과의 교유를 중심으로 -
김용태

溪 尹定鉉(1793~1874)은 19세기 전반기에 추사 김정희, 환재 박규수 등과 학문과 문학 활동을 함께 하였던 당대 최고 수준의 문인이자 학자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침계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침계의 교유관계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그가 여항인, 서얼, 서북인과 같이 소외된 인사들과 매우 친밀하였다는 점이다. 침계는 이들의 능력이 사회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상황을 마음 아파하였으며, 이들이 문학을 통해서나마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그런데 침계는 고증학적 학문경향을 지녔던 인물이었기에 학문의 ‘전문성’을 매우 중시하였고, 나아가 문학도 ‘전문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평소 지론에 비추어 볼 때, 여항인 서얼들의 문학활동은 대단히 바람직한 것이었다. 사회에서 소외되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문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러한 점을 침계는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침계는 이들의 문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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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4 citations·2008
李建昌의 「李卓吾贊」에 대하여
김용태

본고는 이희목 교수에 의해 십수년 전에 보고되었으나, 그 사이 학계에서 ‘잊혀진’ 자료였던 이건창의 「이탁오찬」이란 글의 존재를 학계에 환기하고, 그 내용과 의의를 검토하여 이건창 문학을 새롭게 이해하는 시각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다. 「이탁오찬」은 陽明左派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李贄를 칭송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기에, 최근 들어 그 열기가 더해지고 있는 양명좌파와 公安派의 수용에 대한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탁오찬」은 이건창이 20대에 지은 글인데, 이 당시 내면적으로 울분상태에 있던 이건창은 양명좌파 및 공안파를 접하면서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이건창은 양명좌파 및 공안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지만, 양명좌파 및 공안파의 사유를 자신의 문학적 목표와 실천의 자양분으로 적절히 활용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건창 문학을 주로 ‘古文’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던 기존의 연구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실상 이건창 문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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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4 citations·2006
玉垂 趙冕鎬의 遊戱的 시정신
김용태

玉垂 趙冕鎬는 19세기의 중요한 시인이지만 근년에 들어서야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그 시세계의 전모가 아직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옥수 시문학의 핵심적 정신으로 ‘遊戱人間’의 세계관에 주목하였다. ‘유희인간’은 玩世不恭의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현세의 삶을 잠시 노니는 소풍쯤으로 여기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옥수는 ‘유희인간’의 정신을 토대로 남성중심주의 나아가 인간중심주의를 상대화하여 자신과 사물을 성찰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옥수의 정신세계는 다양한 한시로 표출되었는데, 자신의 ‘배고픔’, ‘가려움증’과 같은 인간적 욕구들을 희화적으로 표출하기도 하고, 가사노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남성들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시들을 ‘탈권위적 자기 인식’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옥수는 영물시를 창작함에 있어서도 ‘유희인간’의 시정신을 발휘하여, 인간이 만물의 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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