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성 교수
Hyeong-sung Kwon
서울대학교 · 인문학
연구실 소개
권혁성 교수의 연구실은 고전 철학,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 및 실체론을 중심으로 예술, 미메시스, 카타르시스, 본질론 등 핵심 개념을 철학사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한 예술의 본질과 카타르시스의 정신적 기능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 전통적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해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연구는 고전 철학의 개념을 현대 철학적·미학적 문제에 연결하여 재구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연구 현황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요 논문
15본고는 플라톤의 예술론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려 하는데, 이 시도는 그의 예술론 논의들의 중심을 이루는 『국가』의 예술론 논의들에 집중하는 가운데 종래의 많은 논의들 속에서 오랜 숙고의 대상이 되어 온 다음의 두 가지 중심적인 쟁점들을 재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1. 그에게 있어 예술들의 공통적인 본성으로 여겨지는 미메시스란 정확히 무엇인가? 2. 시 비판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예술 비판 전체에서 예술들이 갖는 미메시스라는 본성은 정확히 어떻게 평가되며, 이에 따라 제시되는 그의 예술관의 전모는 어떤 것인가? 이러한 두 가지 쟁점들을 중심으로 『국가』에서의 플라톤의 예술론을 재조명함으로써 본고는 다음과 같은 논점들을 분명히 한다. 예술에 있어서의 ‘미메시스’는 ‘인간의 행위, 성격, 감정 같은 비감각적 의미 내용의 표현/재현’으로 기능하는, ‘감각 가능한 현상의 모방’이다. 그것은 물론 감각 가능한 현상의 모방이라는 국면을 자기 본성의 일면으로 가지는 한에서 감각 가능한 현상보다
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예술 전반의 본질로 이해되는 ‘미메시스’의 본성과 구조를 탐구한다. 『시학』에 따르면, 미메시스는 예술가가 삶에 대한 지성적 이해를 토대로 착상하는 어떤 성격에 따른 가능한 인간 행위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감상자에게 그의 지성에 따라 이해될 수 있도록 감각적 매체로 재현/표현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메시스에서 감각적 매체로 이루어진 미메시스 소산은 어떻게 성격과 같은 지성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비감각적 요소로 가득 찬 인간 행위의 재현/표현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은 『시학』 외부의 그의 몇몇 텍스트들이 함께 고려될 때 헤아려질 수 있다. 그것에 따르면, 각 예술의 미메시스는 그 소산과 대상 사이의 영상 관계의 존립 여부에 따라 다음의 두 부류로 구분된다. 음악과 무용의 미메시스는 그 소산과 대상 사이의 영상 관계 없이 그 소산에 수반되는 비감각적 요소가 대상의 비감각적 국면을 형상적으로 상응하게 재현/표현하는 데에 존립하는
『형이상학』의 Z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연구는 하나의 본격적인 형태로 심화된다. 여기에서 그의 주요과제는 감각 가능한 복합실체들에 있어서 그것들의 생성ㆍ존재와 인식의 원리라는 의미에서 첫째 실체라고 불리는 형상에 대한 이해와 설명에 있다. 이 실체연구를 시작하며 그는 그 전체의 기반이 될 하나의 근간논제를 도입하는데, 실체는 ‘첫째 기체’이며 ‘어떤 종류의 이것’이자 ‘분리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세 실체 표징들은 Z에서의 그의 실체 연구 전체를 통해 실체에 자명하게 귀속되는 기본적 특징들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것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Z에서의 그의 실체 이해의 기반으로서 중요하게 주목될 가치가 있다. 이에 본고는 세 실체 표징들에 대한 그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연관된 텍스트들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추적하려 한다. 이 탐구에서 본고는 특히 첫째 실체로서의 형상에 대한 그의 생각에 주목하려 하며, 이를 통해 본고가 궁극적으로 보이려 하는 것은 형상에 대
Das Anliegen des vorliegenden Beitrags ist es, der ästhetischen Bedeutung der Katharsis in der Poetik des Aristoteles und in deren Interpretation durch Lessing nachzugehen. Die Poetik des Aristoteles hat bis in die Gegenwart eine lange Interpretationsgeschichte erfahren. In dieser reichen Tradition zeigt sich Lessing als ein deutscher Ästhetiker des 18. Jh.s, der unter den Interpreten der Katharsis eine in höherem Grade von Aristoteles’ Denken selbst geprägte Auslegung unternimmt als viele ander
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하는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종래의 주도적 해석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재조명한다. 그 해석들은 카타르시스 이해에 다소간 중요한 기여들을 하면서도, 각자의 입장을 위한 경직성 때문에 한계들도 갖는다: 도덕주의적 해석은 그 한 가지 대표적 노선을 통해 카타르시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이해되는 ‘도덕성’과 연계될 길을 적절히 보여주기는 하나, 카타르시스를 전면적으로 도덕적인 것으로 파악하려는 과도함을 보인다. 도덕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며 본격화된 의학적 해석은 카타르시스의 ‘감정 치료’ 본성을 적절히 지적하면서도 그것의 ‘도덕성’과의 연관을 무리하게 부인하며, 이 후자의 해석을 비판하며 최근까지 활발히 개진되는 인지주의적 해석은 카타르시스의 ‘인지적’ 기반을 훌륭히 지적하고 때때로 그것의 ‘도덕성’과의 연관도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것의 ‘감정적’ 본성에 합당한 비중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한계들을 극복하면서 이 기여들을 조화롭게 통합할 새로운 관점을 아리스토텔레
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에 대한 하나의 오랜 전통적 해석으로서 “보편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입장에 대항하여 재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 해석적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어떤 이것”이라고 불리며 실체로 간주되는 대표적인 사물인 개별자에 있어서의 본질을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모든 개별자들에도 공통적인 종적 보편자라고 설명하는데, 본고가 보기에 이 입장은 지지되기 어려우며, 오히려 하나의 주어진 개별자의 본질을 그것에 고유하게 귀속되는 개별자라고 설명하는 이른바 “개별주의적” 본질 해석이 그의 생각을 온당하게 대변한다. 이러한 본고의 견해는 그의『형이상학』중 실체연구에 본격적으로 바쳐지는 Z의 논의 가운데 본질을 다루는 중심 텍스트들에 대한 고찰 속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체적인 논거를 얻을 수 있다: 이 텍스트들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범주론』에서의 자신의 실체이해와 연속적으로 실체를 ‘어떤 이것’으로서의
본고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의 즐거움 논의에서 제시되는 운동과 활동 구별을 검토하는 일을 주요 과제로 삼는다. 이 논의에서 이 구별은 운동의 즐거움에 대한 어려운 문제를 낳는데, 그것은 운동과 활동을 그 자체로 목적인지의 여부에 따라 ‘미완의 실현’과 ‘완성된 실현’으로 대립시키면서 즐거움을 활동에 귀속시키고 운동에 대해서는 그것을 부정하는 반면, 이 논의에서는 운동에 대해 즐거움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논점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 구별을 포함한 이 논의 전체에서 영혼 능력의 발휘가 “활동”으로 불린다는 것에 착안하여 해결할 수 있다. 영혼 능력의 발휘는 가능태의 실현으로서 내적 본성에 있어서는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점에서 완성된 실현으로서 활동인 반면, 그것은 외적 목적을 향한 과정을 이루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미완의 실현으로서 운동이다. 따라서 어떤 운동의 과정이 영혼 능력의 발휘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즐거운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이자 동일한
본고는 플라톤이 『국가』 10권에서 시인추방을 위한 기반으로 제시하는 ‘영혼이분법’이 4권의 ‘영혼삼분법’과 갖는 일관성을 설명하면서 이곳의 시 비판을 적절히 되새길 길을 마련하려 한다. 이런 설명을 시도한 기존의 논의들 중 소수의 견해를 공유하는 입장에서, 본고는 10권의 이분법은 4권의 삼분법에 따라 가능한 영혼 구분으로서, 기개가 훌륭한 사람에게서처럼 본성대로 이성에 따르는 경우, 그것을 이성과 함께 영혼의 ‘이성적 부분’에 귀속시키고, 기개가 영혼이 타락한 사람에게서처럼 욕망에 따르는 경우, 그것을 욕망과 함께 ‘비이성적 부분’에 귀속시키는 영혼론이라고 이해한다. 이 이해를 위해서는 10권의 시 비판 중 ‘시에 대한 최대의 비난’ 부분이 중요한 단서를 담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함으로써, 본고는 이 이해를 지지할 새로운 논거를 제시하면서, 영혼이분법이 이 시 비판에 기여하는 바를 살펴본다.
플라톤이 “영감” 개념에 따라 제시하는 시 논의는 종래에 드물지 않게 시를 찬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해석될 경우 그의 시 논의 전체가 어떻게 일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에 대한 난제가 생겨난다. 『국가』에서 “미메시스” 개념에 따라 이루어지는 그의 대표적인 시 논의가 시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기여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 때문인데, 이 시 논의가 ‘시인 추방’을 선언하는 것인 한, 이 난제는 해결될 길이 없다. 그런데 이 난제는 본래 플라톤의 시 논의 자체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영감” 개념에 따른 그의 시 논의를 시에 대한 찬미로 보는 해석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이 시 논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본질적인 비중을 갖는 모든 텍스트가 면밀히 검토될 때 확인된다. 이러한 검토가 이루어질 때 드러나는 것은 플라톤이 “영감” 개념 아래에서 시 일반에 대해 ‘앎으로서의 기술’과 ‘이데아 인식’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
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재고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종래에 빈번히 잘못 이해되어 온 음악의 카타르시스에 대한 『정치학』 구절이 면밀히 재고되어야 한다. 이 재고에 따르면, 이 구절이 카타르시스에 대해 대변하는 견해는 그것 전체가 『시학』에 따라 비극의 카타르시스에 대한 해석에 수용될 수 있다. 그 결과,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비극이 플롯에 의해 이를 이해하는 관객의 마음에 연민과 공포를 강렬하게 환기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러한 감정들을, 현실에서라면 그것들이 다소간 가졌을 수 있는 혼연함 없이, 정련된 상태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이러한 정련된 감정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덕성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기여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카타르시스는 그것의 종료에 의해, 이 감정 경험이 또한 강렬한 것으로서 종료되면 가라앉기에, 관객의 마음에 즐거운 경감을 가져다준다.
‘비극에 고유한 즐거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극의 목적으로 거론된다. 이러한 비중 있는 지위 때문에 이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일은 이 저술의 비극론에 대한 이해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데, 이 주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고 생각된다. 이 중 한 부류가 『시학』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적절한 입장인데, 그것은 이 즐거움이 『시학』 4장에서 미메시스 작품에 대한 이해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되는 인지적 즐거움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지주의적인’ 해석이 이 주제를 충실히 다루려면, 이 저술 14장에서 비극에 고유한 즐거움을 규정하는 정식을 적절히 설명해야 한다. 그것은 “미메시스를 통해 연민과 공포에서 유래하는 즐거움”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정식 중 ‘연민과 공포에서 유래하는’이라는 항목이 그것을 인지주의 입장에서 설명하려 할 때 중심 문제가 되는데, 이 항목이 축자적으로 이해되는 한, 이 정식에 대한 설명은
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의 정체에 관한 하나의 중요한 물음으로서 그것이 보편자인지 개별자인지의 문제를 그의 실체연구 중 생성이론에 바쳐진 『형이상학』 Z 8 논의를 중심으로 고찰한다. 이 논의는 ‘형상의 비생성’을 중심 논제로 전개하면서, 형상의 ‘선 존재’와 ‘내재’라는 그것의 모든 존재 방식에 관한 구체적인 시사를 제공하는데, 여기에는 이 문제에 관련된 중대한 긴장의 소지가 담겨있다. 이 중심 논제는 형상의 선 존재라는 논점과 함께 형상의 영원성을 함의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거니와,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 영원한 보편자라는 해석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반면, Z 8 논의에서 그는 형상을 그것의 내재에 따라 개별자로 파악하면서 그것이 또한 인식 가능한 보편적 특성을 갖는다는 견지에서 그것에 보편성을 귀속시키는 방식의 이중적 형상 이해를 명백히 보여준다. 따라서 이 논의에서 형상이 영원한 보편자로 간주된다면, 이 이중적 형상 이해는 이에 따라 파악되는 형상이 본래 영원한 보편
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던져놓은 오랜 난제들 중 하나인 ‘하마르티아’의 문제를 다룬다. 이 문제는 ‘하마르티아’가 ‘악덕 아닌 도덕적 잘못’임을 주장하는 ‘도덕주의 해석’과 그것이 ‘도덕적으로 무고한 인지적 잘못’임을 주장하는 ‘인지주의 해석’의 대립 속에서 오늘날까지 오랜 논란거리가 되고 있지만, 양 입장의 합당한 부분을 수용하는 ‘포괄주의 해석’이 수립될 수 있기에 적절한 답변으로 인도될 수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하마르티아’는 양자의 잘못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범위에 걸친 것이다. 이는 이상적 비극에 대한 『시학』 13-14장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지지된다. 13장 논의는 이상적 비극이 ‘비극으로서’ 만족시켜야 할 것을 지적하면서 모든 비극에 적용되는 논지를 제시하는 가운데, ‘하마르티아’를 모든 비극에 귀속시킨다. 이에 따라 그것은 ‘악덕 아닌 도덕적 잘못’과 ‘도덕적으로 무고한 인지적 잘못’ 모두를 포괄하는 넓은 범위에 걸치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14장
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 이해에서 『수사학』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갖는 관계를, 이 즐거움 이해의 ‘연속성’에 주목하여, 새로이 규명하려 한다. 이 연속성은 양 저술의 즐거움 논의가 ‘즐거움은 욕구의 실현’이라는 생각을 공통된 근간 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즐거움 논의는, 『수사학』에 수용된 플라톤적 즐거움 개념이 ‘즐거움은 운동의 과정이니 좋은 것일 수 없다’고 설명하므로, 이를 윤리학적 목적에 따라 비판하고 이 목적에 부합하는 학문적 엄밀성을 가진 대안으로서 ‘활동’ 개념을 제시하면서도, 이 플라톤적 개념이 즐거움을 욕구의 실현으로 이해하기에 기본적으로 진리성을 갖는다고 인정한다. 이 진리성은 『수사학』의 목적에 부합하는 수사학적 진리성인데, 『수사학』의 즐거움 논의는 윤리학적 목적에 따른 ‘학문적 엄밀성’은 요구하지 않고 ‘통념적’ 진리성에 따라 연설가에게 설득의 기술을 가르친다는 실제적 목적에 지배된다. 따라서 이 논의가 통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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