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sung Park
Hanyang University · 工学
研究室紹介
Professor Chan-sung Park's research lab specializes in modern Korean political history, with a focus on the development of constitutionalism, nationalism, and state formation in Korea during the 19th and 20th centuries. The lab explores the intellectual and institutional transitions from absolute monarchy to republican governance, the role of reformist movements, and the evolution of national identity under colonial rule. It also examines the historical construction of concepts such as 'nation,' 'people,' and 'citizenship' through state-sponsored education, cultural institutions like the kisaeng schools, and transnational influences from China and Japan.
Research Overview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Selected Papers
15The western form of government was introduced in Korea through Chinese books in 1840s. It was not until 1880s that Korean people had a real understanding of constitutional monarchy system and democratic republic system. Until then absolute monarchy has been established in Korea and politicians of reformist group thought that people in Korea had a too low political awareness to maintain a republican form of government. The reformist group in Korea attempted to make a first step of constitutional
<국문요약> 1960년대 이후 한국학계를 지배해온 이론은 내재적 발전론이다. 내재적 발전론이란 식민주의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대두한 이론이다. 즉 한국사는 타율에 의해 움직여 온 역사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내재적으로 움직여 온 역사라는 것, 그리고 정체된 역사가 아니라 꾸준히 발전해온 역사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 내재적 발전론이었다. 내재적 발전론은 1960년대 한국사에서 시작되어 국문학, 한국철학 등 한국학 전반에 걸쳐 확대되어 한국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내재적 발전론은 1) 식민주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주장하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2)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특수성보다는 세계사적인 보편성과 관련하여 살필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한국학계에 등장한 이와 같은 내재적 발전론이 오늘날에는 오히려 거꾸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은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
During the 1920s and 1930s,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in Korea,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the provincial authorities organized a group tour to Japan to provide the opportunities to observe the development in Japan. The members of the tour group were the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s, school teachers, financial specialists, members of the young men's association, and the Confucian scholars in Korea. They usually visited Simonoseki, Osaka, Kyoto, Nara, Tokyo, Niko etc. Somet
중국에서는 이미『상서』시대에‘족류’라는 말로써 종족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리고이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쳐『조선왕조실록』을 보면‘족류’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조선에서‘족류’는‘아족’을 여진족이나 왜족과 구별할 때 쓰는 말이었다. 그런가하면『조선왕조실록』에는‘동포’라는 용어도 자주 등장했다. ‘동포’는 본래 같은 형제자매를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어 갔다. 특히 장재(張載)의『서명(西銘)』에 나오는‘백성은 나의 동포(民吾同胞)’라는 말을 국왕은 자주 인용하면서 백성들을 애휼의 대상으로 지칭할 때‘동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국왕들은 더 나아가 양반 등 지배층에게 호포제 실시를 요구할 때, ‘모든 백성은 나의동포’라는 말을 자주 끄집어내었다. ‘동포’라는 말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 운동이후 더욱 자주 사용되었고, 그 의미도 확대되었다. 이때의‘동포’는 단순히 국왕의은혜를 입는 백성들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 서서히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 동포 내부의 평등
이 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이 대한민국에 어떻게 계승되었는가를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임시정부의 헌법은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5차에 걸쳐 개정되었다. 특히 권력구조와 관련하여 대통령제 – 국무령제 – 국무위원제 – 주석제 등의 변화를 거쳤는데, 국무령제부터는 대체로 내각책임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 대통령제의 경우에도 국무총리와 각 부 총장들을 모두 임시의정원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어, 사실상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가 섞여 있는 혼합형 제도였다. 따라서 임시정부보다는 임시의정원이 우위에 있는 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초기의 대통령제에는 단일지도제체를 취하였지만, 국무령제와 주석제 시기에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를 취하였고, 국무위원제 시기에는 순수한 집단지도체제를 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권력구조에 관한 조항들은 큰 변화를 보였지만,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조항은 당시 어느 나라 헌법에도 보이지 않던 것으로, 매우
한국전쟁은 내전적 성격을 갖는 전쟁이었다. 특히 인민군이 점령했던 남한 지역에서는 우익과 좌익으로 나뉜 민간인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은 그동안 이 문제를 농촌 마을 차원에서 다룬 논문들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전쟁기 각 농촌마을에서 빚어진 좌우충돌의 사례를 보면, 그러한 충돌이 일어난 배경에는 크게 3가지 갈등이 있었다. 첫째는 마을 내부의 서로 다른 신분간의 갈등, 계급간의 갈등이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19세기 말에 제도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 기서 빚어진 양반계층과 평민 혹은 천민 계층 간의 갈등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폭발하였다. 지주와 소작인·머슴 간의 계급 갈등 또한 중요한 충돌 요인이 되었다. 물론 일부 지주들은 오히려 소작인들에 의해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인민군과 지방 좌익들은 소작인들과 머슴들에게 계급의식을 불어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1921~28년 사이에 발생한 학생들의 맹휴 사건은 초등 학교의 맹휴가 342건, 중등 이상 학교의 맹휴가 460건으로 모두 802건이 된다. 초등 학교에서 발생한 맹휴의 원인 가운데에는 교원배척이 53.5%, 학교설비 개선이 13.4%, 엄격한 훈육과 교칙에 대한 반발이 11.4%를 차지했고, 사상문제는 2.6%에 지나지 않았다. 즉 초등 학교의 맹휴 가운데 교원배척과 관련된 맹휴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나오는 교원 배척과 관련된 맹휴 사건의 맹휴 이유를 세분해서 보면, 1) 교사의 생도에 대한 구타나 체벌, 2) 교사의 실력 부족과 불친절, 무성의, 불공정, 3) 교사의 좋지 못한 품행, 4) 학생에 대한 무리한 처벌, 5) 조선역사나 창가를 가르치지 않는 것, 6) 교장이나 교사의 민족차별의식 등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건수를 기록한 것은 교사의 생도에 대한 구타나 체벌의 경우였다. 당시 교사들은 학생들을 엄격하게 훈육한
평양의 옛 관기(官妓)들과 기생서재(妓生書齋)에서 교육을 받은 새로운 기생들은 1910년대 초에 당국(경찰)의 지시로 기생조합을 조직하였다. 기생조합은 1920년에 기성권번으로 개칭되었다. 1910년대 초 3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평양 기생은 1920년대 말에는 160여 명으로 늘어났고, 1930년대 중반에는 3백 명 가까이 되었으며, 1937년에는 4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1900년경부터 기생을 양성하고 있던 기생서재는 1914년에는 4개로 늘어났다. 이에 평양부와 경찰서는 1920년 이들을 모두 통합하여 기성권번에서 기생학교를 운영하도록 했다. 그 명칭은 기성권번 학예부, 평양기생양성소 등으로 바뀌었다. 학생수는 1920년에 이미 2백 명에 달했으며, 매년 70명 내지 80명이 졸업하였다. 이 가운데 평양에 남을 수 있는 졸업생은 2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머지 졸업생들은 경성을 비롯하여 타지로 떠났다. 이로 인해 평양 기생학교는 전국에서 유일한 기생양성소로서 그 명성이
백두산은 오늘날 흔히 ‘민족의 영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 그리고 한국인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백두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주로 조선 산천의 조종산이라는 지리적 표상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는 조선후기까지 이어졌으며, 조선후기에 백두산은 중국의 곤륜산과 대등한 명산으로서, 조선의 소중화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또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워지면서 백두산의 일부가 조선의 영토에 확실히 편입되었기 때문에, 비록 소수이지만 백두산에 관심을 갖고 이곳에 다녀오는 이들도 나타났다. 19세기 후반 들어 함경도의 주민들 가운데 두만강을 건너 간도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백두산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은 두만강과 다른 강으로서 송화강의 한 지류라고 주장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도 한때 그와 같은 인식을 갖고 청국과 국경 교섭에 나섰다. 그러나 1712년 정계비를 세울 당시 ‘토문강은 두만강과
금산군 부리면은 28개 마을 거의 대부분이 동족마을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성씨는 해평 길씨와 남원 양씨이다. 길씨들이 많이 사는 곳은 불이리와 현내리, 예미리, 양곡리 등이다. 양씨들이 많이 사는 곳은 평촌리, 양곡리이다. 양곡리에는 길씨와 양씨들이 섞여 살고 있다. 길씨들은 길재의 후손들로서 오랜 세월 동안 부리면에서 굴지의 양반 가문으로 꼽혀왔다. 양씨들은 양응해의 후손들로서 길씨에 버금가는 양반 가문으로 행세해왔다. 1931년부터 1960년까지 면장을 지낸 이들(8명)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길씨와 양씨들이었다. 특히 길씨는 5명을 차지했으며, 길상목은 1930년대에 10년 동안 면장을 지냈다. 하지만 길씨들 가운데 길상목의 아들 길경섭·길귀섭 형제와 같은 집안 길재철 등은 1920년대 후반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깊이 관계하여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이들은 해방 직후 건준과 인민위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길상목이 면장 재직 시 면서기로 근무한 이들은 길상목ㆍ길
3ㆍ1운동기 가장 먼저 뿌려진 지하신문은 천도교측이 만든 『조선독립신문』이었다. 『조선독립신문』1호는 민족대표의 독립선언과 체포 소식을 담고 있었다. 2호부터 4호까지의 신문은 민족대표의 체포 소식, 임시정부가 수립될 예정이라는 소식, 3월 5일의 남대문정거장 앞의 학생 시위 소식 등을 전하였다. 5호부터 9호까지의 신문은 운동의 후속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3월 22일 서울에서 다시 일어난 시위 소식을 상세히 전하였다. 배재고보와 보성전문 교사가 만든 『조선독립신문』10~15호 역시 서울에서의 3월 22일 시위 소식과 경찰의 가혹한 탄압 소식을 전하였다. 『조선독립신문』은 3월 초부터 3월 말까지 모두 16호가 발간되었다. 『조선독립신문』은 초창기에는 운동 주체 측의 운동에 대한 구상과 운동의 진행상황을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후에는 운동의 진행상황을 전달하면서 운동을 독려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독립신문』이 발간된 뒤 청년ㆍ학생층은 이를 본뜬 지하신문들을 우
강진의 민족운동과 관련해서는 청년운동, 학생운동, 신간회운동 등을 들 수 있다. 강진의 청년운동은 1920년대 초 부르주아적인 계몽운동의 성격을 띠고 시작되었지만 비교적 부진했다. 그런 가운데 1927년 고군면(병영) 쪽에서 사회주의적 청년운동이 시작되었다. 또 1927년에는 다른 군들과 마찬가지로 강진군에서도 강진청년동맹이 조직되었다. 하지만 각 면 단위에 설립되는 지부는 겨우 세곳에 그쳤다. 강진의 학생운동으로는 1930년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대구면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맹휴를 들 수 있다. 이 맹휴는 대구면 수동리의 윤가현과 강원태가 보통학교 학생들을 부추겨서 일어난 것이었다. 강진의 신간회는 1927년 가을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군면(병영) 쪽에서는 1928년 3월 따로 병영지회를 설립할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이는 좌절되었고, 결국 강진지회에 통합되었다. 통합된 강진지회에는 그동안 사회운동을 해 온 이들과 민족운동을 해온 이들(특히 천도교 간부)들
The tenancy dispute in Amtae island was the most famous tenancy dispute during the colonial period. It occurred because the tenant farmers had to pay too much high rent to Moon Jae-Chul, the landowner. Moon who owned the largest farmland in Amtae island charged 60~80% of the harvest for the rent. At that time the general rent rate was 50%. The tenants of Amtae island organized the Amtae Tenants Association in December 1923. The association resolved that the rent should not exceed 40% of the h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