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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jae Park

Korea University · 社会科学

研究室紹介

Professor Daejae Park's research lab specializes in early Korean state formation, ancient Korean-China relations, and the historical archaeology of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Proto-Three Kingdoms period. The lab focuses on re-evaluating classical texts such as the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Weilüe*, and *Sanhuijing* to reconstruct early political structures, including the transition from chiefdoms to early states, and investigates the geopolitical dynamics between Gojoseon, Yan, Qi, and Yemaek states. The lab also conducts critical philological and chronological analysis of historical records, particularly regarding the Dangun mythos and the Yemaek migration narratives, to assess their historical authenticity and cultural construction over time.

early state formationGojoseonancient Korean-China relationshistoriographical analysistextual archaeology

Research Overview

Papers
65
Total Citations
288
Papers (5y)
7
Primary Field
社会科学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Publications per year (5y)
7total
2022
2023
2024
2025
2026
Citations per year (5y)
0total
20222023202420252026

Selected Pa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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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ticle|34 citations·2017
고조선 이동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박대재

최근 학계에서 비교적 많은 공감을 받고 있는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은 『위략』 에 보이는 연장(燕將) 진개(秦開)의 요동 진출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기원전3세기 초 연(燕)의 요동 진출을 계기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險瀆]에서 평양[王險城]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위략』에는 연이 침공했던 지역이 고조선의 중심지가 아니라 그 ‘서방(西方)’이었다고 나온다. 연의 침공지역은 『사기』 조선전에는 ‘진번(眞番)·조선(朝鮮)’으로 나오고, 『산해경』에는 한수(漢水) 동북의 ‘맥국(貊國)’으로 보인다. 연이 공격했던 조선의 서방은 바로진번(古眞番), 맥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古)진번(眞番)과 맥국의 위치는 서요하(西遼河, 遼水)와 동요하(東遼河, 沛水)가 합류하는 요북(遼北) 지역(鐵嶺 이북)으로 비정되며, 연과 조선의 경계가 된 ‘만번한(滿番汗)’도 동요하유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의 요동 진출은 고조선의 서방 세력을 멸망시켜 고조선 약화에 영향을 미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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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25 citations·2014
古朝鮮과 齊의 해상교류와 遼東
박대재

『管子』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發朝鮮)과 중국의 관계는 기원전 7세기 무렵 춘추시대 齊와의 교류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관자』에 전하는 고조선 기록은 춘추시대의 사정을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제와 발조선의 교류는 산동반도 북부 東萊와 요동반도 남단 老鐵山을 연결하는 해상의 廟島列島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춘추시대 산동반도 東萊지역은 齊國과 적대 관계에 있던 萊國의 영역이었다. 동래지역이 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은 춘추시대 말기인 齊 景公 때(기원전 547~490년)이다. 따라서 기원전 7세기 춘추시대에 齊가 동래지역을 경유해 해상으로 발조선과 교류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齊와 교류하였던 發朝鮮은 문피의 산지로 유명하였는데, 제와의 교통로를 고려할 때 遼東의 千山 산간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 설에 따르면 『爾雅』의 斥山은 문피 산지가 아니라 문피가 중국에 수입되던 海口로 登州 文登縣 斥山(赤山)에 비정된다. 하지만 고대의 해로상 춘추전국시대 문등현

4
Article|22 citations·2006
古朝鮮과 燕 齊의 상호관계-기원전 4세기말-3세기초 전쟁 기사를 중심으로
박대재

기원전 323년 무렵 燕은 齊의 ‘稱王’에 영향을 받아 왕호를 자칭하며 동쪽으로 朝鮮을 침공하려고 한다. 이에 朝鮮도 스스로 ‘王’을 칭하며 燕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朝鮮의 大夫 禮의 유세에 의해 양국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 사전에 무마되게 된다. 한편 齊와 朝鮮은 춘추시대 이래로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廟島列島의 해상로를 통해 우호적인 교류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314년 齊가 燕의 내란을 틈타 침공하자 朝鮮도 燕의 동쪽 변경지역 즉 遼西지역에 침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鹽鐵論과 博物志에 전하는 朝鮮의 燕 침공 기록은 바로 燕의 대혼란기(314~312 B.C.)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齊의 침공으로 王이 사망하고 거의 멸망상태에 이르렀던 燕은 기원전 311년 燕 昭王이 즉위하면서 혼란을 수습하고 齊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게 된다. 燕 昭王은 28년간 추진한 부국강병의 결과로 기원전 284~283년 드디어 齊를 정벌하여 거의 몰락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5
Article|20 citations·2015
檀君紀元과 「古記」
박대재

이 글에서는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단군 관련 연대 기록에 주목하여 그 의미와 성격을 새롭게 살펴보았다. 『三國遺事』 고조선조에 인용된 「魏書」, 「古記」와 『帝王韻紀』등에는 단군의 즉위원년 및 통치기간에 대한 구체적인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위서」에서 ‘2천년 전’에 단군이 조선을 개국했다는 것은, 그 기록의 기준 시점이 부여나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음을 살펴보았다. 즉 부여나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그 前史로 2,000년 전 단군의 조선 건국이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시사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고기」에 보이는 단군원년이 庚寅年이었다는 기록은, 唐 開元 15년(727)에 편찬된 一行의 『大衍曆』에 기초한 것임을 밝혀보았다. 단군원년 庚寅年으로부터 통치기간 1,500년을 계산하면, 箕子가 조선에 受封된 己卯年과 간지상 연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이것은 「고기」가 기자의 시기를 단군의 통치기간 내에 포함시켜 이해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즉 단군의 퇴위는 기자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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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20 citations·2013
국가형성기의 복합사회와 초기국가
박대재

국내학계에서는 고대의 국가형성을 율령제와 고총고분으로 표상되는 4세기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 단계는 중앙집권체제의 성숙국가(mature state)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국가형성은 그 이전 초기 고구려, 부여, 마한(백제), 진한(신라), 변한(가야) 단계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 국가형성기의 국가 형태가 바로 초기국가(early state)이며, 그 기원은 고조선 말기까지 소급될 수 있다. 초기국가는 군장사회(chiefdom)와 성숙국가의 중간단계로서 내적으로는 율령제나 관료제와 같은 중앙집권체제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지만, 외적으로는 중추적인 왕권을 중심으로 지역수장을 경유해 주변 복합사회에 대한 지배가 분층적으로 이루어지던 국가 형태이다. 초기국가의 중앙과 지역 복합사회 간의 상호관계는 「공납」과 「재분배」에 기초한 쌍방향적인 지배-종속관계였다. 이러한 초기국가의 지배구조는 「공납제적 지배」라 할 수 있는데, 성숙한 고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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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19 citations·2011
準王南來說에 대한 비판적 검토 -조선유민의 마한 유입과 관련하여-
박대재

기원전 2세기 초 準王이 위만에게 쫓기어 ‘韓地’로 망명하여 ‘韓王’이라 칭하였다고 하는‘準王南來說’은 280년대 편찬된 陳壽의 『三國志』에서 처음 보인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魏略』(260년대 편찬)과 『潛夫論』(2세기 편찬)에서는 준왕의 망명지역을 막연하게 ‘海中’이라고만 기록하여, ‘韓地’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한 『삼국지』와 차이가 난다. 준왕남래설에보이는 ‘韓王’, ‘韓地’의 용어는 後漢 이후 알려진 지리 정보에 의해 후대의 진수가 추가로기록해 넣은 것이다. 따라서 기원전 2세기의 준왕이 ‘韓地’에 가 ‘韓王’이 되었다는 것은역사적 서술이 아니며, 이를 포함한 준왕남래설 자체도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윤색된것임을 시사해준다. 『삼국지』에서 준왕을 箕子의 40여 세 孫으로 기록한 것은 자신들의家系를 기자나 준왕과 연결시키고자 했던 후대의 씨족, 특히 樂浪지역 韓氏나 王氏의계보에 근거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낮다. 준왕이 기자의 후손이며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점에서 준왕의 존

8
Article|19 citations·2015
고조선의 정치체제
박대재

고조선의 정치발전 과정은 왕호의 변화에 따라 초기의 고유 왕호인 ‘왕검’ 단계에서 기원전 4세기 후반 이후 중국식 왕호인 ‘왕’ 단계로의 발전으로 요약된다. 기원전 323년 이후 고조선 정치체제의 중추에는 ‘王’이 있었고 그 관료로 大夫가 있었다. 고조선의 대부는 전국시대의 中大夫와 비슷한 爵位와 職官의 성격을 아울러 가진 존재로 이해된다. 대부의 존재로 미루어 보아 고조선의 관제에서 卿의 존재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조선 말기의 관제인 博士는 변경 지방의일정 지역에 대한 主宰權을 국왕으로부터 위임받고 국왕과 의례적인 공납관계로 묶여 있었던 존재로 이해된다. 고조선 관제에서 대부와 박사가 함께 보이는것은 전국시대 齊의 관제와 가장 유사한 특징이다. 최근 遼東 鐵嶺에서 알려진 ‘兄’銘 銅刀는 美松里型土器, 扇形銅斧 등과 함께 石棺墓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고조선과 관련될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 ‘兄’이 중국의 官制에서는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후신인 夫餘나 高句麗의 ‘

9
Article|17 citations·2008
夫餘의 왕권과 왕위계승—2~3세기를 중심으로—
박대재

夫餘의 왕권에 대해 기존 연구들은 中國과의 우호적인 관계, 諸加共立에 의한 왕위계승, 풍흉에 따라 왕을 교체하거나 살해하는 풍속 등을 근거로 대외 의존적이며 제가들에 의해 제약 받았던 연맹왕적 성격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後漢書』와 『三國志』의 기록을 새롭게 검토해 본 결과, 부여의 왕위계승은 2세기 초 이래 이미 嫡子相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또한 夫餘 · 高句麗 · 後漢 사이의 상호관계(전쟁 및 교빙) 및 부여 국내의 宮室, 倉庫, 牢獄의 존재를 통해 볼 때 夫餘王은 국내외적으로 자율성을 갖춘 國家(state) 단계의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10
Article|12 citations·2015
古朝鮮의 언어구역과 燕의 동북지역
박대재

고대 한국어와 중국어는 언어계통상 알타이어족과 중국·티베트어족의 언어로 서로 구별되었지만, 언어구역상으로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상호 영향을 미치는 동일한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고대 한국어와 중국어 사이의 접촉에 의한 언어 변화는 낙랑군 설치 이전 고조선 시기부터 진행되었는데, 양웅(揚雄)의 『방언(方言)』에 의하면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燕)의 동북지역과 조선(朝鮮)·열수(列水, 洌水)지역은 등어선(等語線, isogloss)으로 한 데 묶이는 동일한 언어구역이었다. 기원전 108년 한(漢)의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 지역에 연(燕)의 동북지역을 과도(過渡)한 상고중국어(上古中國語, 戰國系 方言)가 이미 유입되어 있었다.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예(濊), 옥저(沃沮) 등 북방 예맥계(濊貊系) 사회의 언어적 공통성은 공통조어(共通祖語)인 고조선어(古朝鮮語)로부터 분화된 계통적 특징이면서 동시에 이들이 고조선의 언어구역에 포함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위만조선 멸망 후

11
Article|12 citations·2009
三韓의 ‘臘日祭祀’와 부뚜막신앙
박대재

Studies on Samhan have for the most part been conducted based on the materials found in the Dongizhuan(東夷傳) section of the <Sanguozhi(三國志, Records of Three Kingdoms)> written by Chen Shou. However, attention should also be paid to a record found in the Dongiliezhuan(東夷列傳) section of the <Houhanshu(後漢書, The Book of the Later Han)> compiled by Wu’s Xie Cheng some 240 before the <Sanguozhi>. In one particular entry, Xie Cheng recorded that, “One of the customs in Samhan was to hold a ritual ceremon

12
Article|12 citations·2002
삼국지 한전의 진왕에 대한 재인식
박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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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11 citations·2009
謝承 『後漢書』 東夷列傳에 대한 예비적 고찰
박대재

『太平御覽』 권33에는 3세기 후반의 『魏略』 『三國志』보다 먼저 편찬된 謝承『後漢書』의 東夷列傳기록이 전하고 있어 새롭게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 謝承은 吳孫權의 첫째 부인이었던 謝夫人의 남동생으로 190년 무렵에 출생하였으며, 『後漢書』는 그가 武陵郡太守시절이었던 240년 무렵에 편찬했던 紀傳體사서였다. 하지만 唐-宋사이에 원서가 망일되어 현재는 그 逸文을 모은 輯本만 전해지고 있다. 謝承의 東夷列傳은 229~236년 吳와 遼東公孫氏및 高句麗와의 교섭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는데, 특히 三韓등 東夷남부에 대해서는 帶方郡을 통해 수집된 정보가 요동 공손씨 정권을 경유해 吳에 전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4
Article|7 citations·1997
辰韓 諸國의 규모와 정치발전단계
박대재
15
Article|6 citations·2018
伊藤東涯의 『三韓紀畧』 편찬과 조선 연구
박대재

1704년 일본 京都 古義堂 2代 當主 伊藤東涯(1670~1736)에 의해 편찬된 『三韓紀畧』은 일본에서 최초로 편찬된 조선 전문 地志이다. 그 안에는 고조선(檀君)부터 조선 중기(宣祖)까지 한국의 역사와 제도가 백과사전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渤海의 역사가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삼국과 고려의 사이에 서술되어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이것은 柳得恭의 『渤海考』(1784)보다 앞서 나타난 발해사에 대한 주목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東涯는 『삼한기략』 이전에 「朝鮮壤墜之圖」, 「朝鮮國官階頒祿圖」, 「朝鮮國官制」 등을 지었는데, 이들이 『삼한기략』의 주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삼한기략』은 東涯 말년까지 교정 작업이 계속되면서 끝내 목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여러 종의 필사본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다만 『삼한기략』 가운데 조선시대 관제 부분은 1711년 『朝鮮官職考』로 간행되어 널리 유통되었다. 『삼한기략』이 필사본으로 유통되었지만, 1747년 제작된 『三韓世表』의 전거자료로

Research Areas

Sociology and Political ScienceAerospace EngineeringCultural StudiesAnthropologyVisual Arts and Performing ArtsComplementary and alternative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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