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su Lee
Ewha Womans University
研究室紹介
Professor Junsu Lee's research lab specializes in critical cultural theory, with a focus on memory, guilt, and shame in postwar German and East Asian cultural narratives. The lab explores the psychological and ideological dimensions of historical trauma through literary and cinematic texts, particularly examining how concepts like 'shame culture' and 'guilt culture' are constructed, contested, and deployed in literature, film, and political drama. A central direction involves analyzing the performative and aesthetic strategies in contemporary German drama and film—especially works by authors like Bernhard Schlink and Heiner Müller—as well as state-sponsored cinema of the Nazi era, to uncover how narrative forms mediate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ideological control.
Research Overview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Selected Papers
15"Bernhard Schlinks Roman Der Vorleser stellt einen Text dar, der mit Scham und Schuld, d. h. mit zwei Begriffen, “die für die deutsche Erinnerungsgeschichte absolut zentral sind” (Aleida Assmann), verwoben ist. Bereits seit der ersten Begegnung mit Hanna, der weiblichen Hauptfigur des Romans, ist der Ich-Erzähler, Michael, ständig der Scham ausgesetzt. Nach seinem “Verrat” empfindet er zwar Schuldgefühle, diese erweisen sich allerdings als Maske des Schamgefühls darüber, dass er mit der inneren
In diesem Aufsatz werden anhand von Spielfilmen der Nazi-Zeit die Arten des ideologischen Eingreifens auf den Prozeß der filmischen Raumkonstruktion analysiert. Bei der romantischen Komödie Allotria (1936) ist eine Tendenz zur Herstellung des realen Raums ohne Realität zu beobachten. In dieser Komödie findet man die Spuren der damaligen Wirklichkeit minimalisiert, wobei das Milieu der oberen Schicht, das vom täglichen Zwang der Wirklichkeit befreit ist, hervorgehoben wird. Das moderne Luxushaus
본 연구는 데아 로어의 「레비아탄」을 예로 삼아 ‘새로운 독일 드라마’의 정치적 연극미학이 어떠한 윤곽을 띠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로어는 전통적인 드라마 형식들을 폭넓게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형식실험들을 과감히 적용한다. 적군파 테러리스트 울리케 마인호프의 폭풍 같은 삶이 아니라 폭풍전야, 즉 아직 결심이 서기 직전의 단계를 허구와 실제를 섞어 드라마로 형상화해봄으로써 로어는 어떤 상황에서 그녀가 폭력에 동의하게 되는가를 되짚어본다. 브레히트의 「조처」와 체홉의 「세 자매」의 영향을 분석해보면, 로어의 근본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마인호프의 삶을 역사기술적 관점이 아니라 잠재태에 대한 관점으로 살펴봄으로써 연극을 다시 가능성의 공간이자 사회적 광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 그리고 드라마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 대한 믿음, 이 점에서 로어의 극작은 분명히 정치적이며, 다른 ‘새로운 독일 드라마’의 극작가들과도 연결된다.
‘수치심 문화’와 ‘죄책감 문화’는 문화이론의 개념이나 범주로서 사실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 개념이 동북아시아 권역에 널리 통용되게 된 데에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수치심 문화라는 개념의 문제성 또한 여기에서 연원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부류의 많은 문화이론 개념이 늦어도 탈식민주의 이론의 전개와 더불어 대부분 유효성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치심 문화와 죄책감 문화 담론은 특이하게도 오히려 훨씬 이전에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도 – 혹은 그 때문에 – 탈식민주의 비평의 관심을 어느 정도 비껴갔고,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이들 개념의 불분명성과 문제점들이 여전히 반복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수치심 문화라는 개념이 편의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 적용되는 경우 또한 무척 많다.
Die Entgrenzungen, mit denen unsere technische Gesellschaft täglich konfrontiert ist, werden meistens mit räumlichen Metaphern dargestellt. Während diese Metaphern meist von systemscheuenden Poststrukturalisten stammen, wird hier Interface als metaphorischer Begriff vorgeschlagen, mit dessen Hilfe man das systemerweiternde Phänomen der Grenzüberschreitungen beschreiben und analysieren kann. Um die Grundlagen für ein besseres Verständnis von Interface zu schaffen, werden zunächst die kleine Genea
자료조사 드라마/연극은 현실의 편린들을 텍스트 안에 옮겨놓기만 하는 장소이동의 극작법이 아니다. 립만이 이미 “이야기된 것을 의심하거나 검증해보지 않”고 “대화와 상황들의 재현 Wiedergabe”(Liebmann 2002, 7)을 목표로 하는 느슨한 기록성을 추구했다면, 슐테는 그 기록들을 다시 발췌해서 산문에서드라마로 재구성한다. 그것에 비록 기록적인 자료가 아주 큰 몫을 차지하지만, 나는 그것을 다큐멘터리연극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처리들이 행해졌으니까. 그것도 무척 많은 측면에서. 그들은 연기자이지 실제 임차인들이 아니고, 텍스트는 응축되었고, 노래들이 함께 하며, 순서도 바뀌었고, 몽타주도 있다. 거기에는 너무 만들어진 게 많아서 여기 이것을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일 것이다.(Lutz 2016) 『보드카 벌레』는 자신이 현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의 진정성은 사실과 실재의 진정성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술적 표현의 진정성”
미셸 푸코의 초기 연구인 『말과 사물』(1966), 「헤테로토피아」(1966), 「다른 공간들」(1967)에서 논구된 헤테로토피아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조건 또는 구성원리를 통해 발현되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위 텍스트들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이 개념을 명확히 분석하고 이어서 푸코가 헤테로토피아의 표상들을 기술할 때 논리적 기저를 형성하는 시간적ㆍ공간적 구조를 추출해보았다. 이를 통해 헤테로토피아는 주로 축적(묘지, 도서관, 박물관)과 한시적 대체(장터, 휴양촌, 카니발)의 시간적 구조나 집적(페르시아 정원, 양탄자, 동물원)과 파생(극장, 영화관)의 공간적 구조, 그리고 이들의 조합을 통해 표상됨을 밝혀내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현실 공간을 염두에 둔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형태들과 예술적 허구공간을 구성하는 연극텍스트에서 발현하는 헤테로토피아에 어떠한 차이점들이 있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며, 이어서 간략하게나마 최근 연극텍스트의 실례들에 대한 분석을 곁들여가며
Nicht Mosaik, sondern Collage wäre die passende Terminologie, um die Wirkungsweise von Heiner Müllers Texten zu beschreiben: die Einzelteile behalten noch ihre Selbständigkeit und konstruieren zugleich als Ganzes einen neuen Sinnzusammenhang. Das alte Schema, laut dessen die individualpsychologischen Motivationen ihren privaten Charakter durch Freilegung ihrer historischen Substanz verlieren (Raddatz), lässt sich für Müllers Texte bereits wegen der Unmittelbarkeit der Textteile nur schwer anwend
한스-티스 레만의 포스트드라마 연극론은 연극계에 끼친 창조적 자극에도 불구하고 극작가의 존재근거를 흔들었으며 형식주의적이고 비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글은 레만의 이론을 염두에 두면서 포스트드라마에서 어떻게 정치성이 모색되는가를 그 대표적인 극작가 엘프리데 옐리넥의 예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논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옐리넥이 쉴러의 「마리아 슈투아르트」에 적군파 울리케 마인호프의 삶를 모핑한 「울리케 마리아 슈투아르트」(2006)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겸했다. 쉴러의 역사비극에서 “언어-분노”에 주목하는 옐리넥은 매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I세의 갈등을 울리케 마인호프와 구드룬 엔슬린의 적군파 내부 권력투쟁 구도와 겹쳐놓는다. 옐리넥의 극단적 전복의 미학은 이를 바탕으로 해체, 반복과 변주, 차가운 시선과 신랄한 언어 등을 동원해서 적군파와 관련된 기존의 이데올로기 내지 ‘신화’들을 극단적으로 붕괴시킨다. 이는 연극은 정치적인 것의 중단을 통해서만 정치
최근의 독일어권 연극텍스트에서는 독특하고 고유한 헤테로토피아적 시공간의 창출이 자주 발견된다. 이를 분석하는 데 미하일 바흐친의 크로노토프 구상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점검이 필요하다. 산문에 초점을 맞춘 그의 연구는 드라마 장르에 무관심한 데다, 크로노토프 개념 자체가 다의적으로 활용되며, 주로 현대 이전의 산문에서 추출된 그의 크로노토프 유형을 현대의 텍스트에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흐친이 크로노토프 개념을 산문에만 국한해 표상하지 않고 스스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을 고려에 넣는 데다 최근의 연극텍스트들이 서사성을 띠는 까닭에 이 개념을 활용해볼 가능성은 열려있다. 바흐친의 크로노토프 구상을 계승·발전시키려는 최근의 노력들, 그중에서도 특히 오스트하이머 연구팀의 제안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최근 연극텍스트 분석에 적합한 분석틀을 도표화하여 제시했다.
Der überraschende Zusammenbruch des Ostblocks gegen Ende des 20. Jahrhunderts hatte eine Störung im utopischen Vorstellungsvermögen zur Folge – eine unbestreitbare Auswirkung, die sich u. a. in Francis Fukuyamas These vom „Ende der Geschichte“ widerspiegelt. Neben der Tendenz, die den „Einbruch des Realen ins Theater“ versuchte, ließ sich eine andere Strömung erkennen, die das Vorstellen imaginärer Chronotopen weitergeführt hat. Rebekka Kricheldorfs Homo Empathicus (2014) soll hier als ein Bei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