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ok Koo
Kyung Hee University
研究室紹介
Professor Man-ok Koo's research lab specializes in the intellectual and scientific history of Korea during the Joseon Dynasty, with a particular focus on the transmission, adaptation, and impact of Western learning (Xixue) in East Asia. The lab explores the intersection of astronomy, calendrical science, mathematics, and Confucian thought, especially in the 18th century, examining how Western scientific knowledge—particularly through figures like Matteo Ricci and texts such as *The Nine Chapters on the Mathematical Art* and *The Complete Encyclopedia of Mathematical Science*—was integrated into Korean scholarly traditions. The lab also investigates the role of key individuals, institutions like the Gwansanggam (Royal Observatory), and the broader cultural and political dynamics that shaped scientific thought in Joseon Korea.
Research Overview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Selected Papers
15서학(西學)이 조선후기 사상사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며, 서학의 전파를 주도했던 예수회와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하나인 마테오 리치의 역사적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중국 선교 과정에서 적응주의 노선과 과학선교 방식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선교 노선에 따라 르네상스기 유럽의 과학과 기술이 동아시아 사회에 전파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학문 체계에서 수리과학을 포함한 철학은 신학과 일체화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그가 과학선교 방식을 채택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이론적 배경 하에서 기하원본(幾何原本)이 번역되었던 것이다. 한편 청(淸)의 강희제(康熙帝) 때에는 서양 과학의 ‘중국원류설’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중서산학(中西算學)의 회통을 표방하는 수리정온(數理精蘊)이 편찬․간행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후반 조선사회에서 기하원본과 수리정온으로 대변되는 서양 수학서는 ‘리수(理數)를 크게 밝힌 책’, ‘고산가(古算家)의 제일대전서(第一大全書)’로 높이 평가되
The Joseon Dynasty was founded based on the national ideology of Confucianism and the Chu-tzu’s doctrines. King Sejong pursued to establish a firm Confucian country, succeeding King Taejong’s legacy as “a king who succeeds ancestors’ accomplishment.” At the time of King Sejong, the Joseon Dynasty pursued its confucian universalism while differentiating its ideology from that of China, considering differences not only in geographical and climatic conditions, but also in language and custom. Reorg
조선후기에는 天文曆算學을 비롯한 自然學 분야에서 새로운 학문 경향이 대두하였다. 그것은 기존의 주자학적 자연학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첫째, 주자학에서는 자연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조선후기에는 자연학의 학문적 가치와 중요성을 긍정하는 논의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종래 ‘小道’로 치부되었던 算學을 비롯한 자연학이 유학자들의 필수 교양으로 격상되었다. 둘째, 物理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다. 이는 理氣論과 格物致知論으로 대변되는 주자학적 세계관과 인식론의 변화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공부의 대상과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 자연법칙으로서의 물리에 대한 탐구가 적극적으로 모색되었고, 탐구의 대상 역시 유교 경전과 그 주석서에서 벗어나 자연물로 확장되었다. 이제 공부는 天地萬物을 대상으로 한 博學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물리에 대한 최신의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西學도 적극적으로 수용 되었다. 셋째, 자연학의 연구방법론에서도 변화가
徐有本은 徐命膺에서 徐浩修‧徐瀅修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達城 徐氏家의 학문과 사상을 밝히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서유본은 柳琴, 金泳, 柳僖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天文曆算學家들과 교유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는 조선후기 과학사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서유본의 학문적 배경과 관련해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서명응 이래 달성 서씨가의 家學이다. 서명응의 象數學, 서호수의 周髀幾何學‧천문역산학‧律呂學, 서형수의 經學은 달성 서씨가의 학문적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서 西學과 考證學의 강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서유본의 학문을 논할 때 西學을 함유하고 있는 가학과 함께 고려해야 할 요소가 ‘北學’이다. 그와 교유했던 당대의 명사들 가운데는 朴齊家, 柳琴, 柳得恭, 成大中, 李喜經 등 ‘북학파’ 인물들이 많았다. 서유본의 집안에는 북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서적과 기구들이 수장되어 있었으니,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幾何原本』
Hwang Yoon-Seok was an 18th century expert on astronomy (tianwen) and calendrical science (lifa), actively involved in academic and social discussions with many contemporaries, including astronomers and calendrical scientists while living in Seoul. Hwang kept a diary where he wrote the details of those conversations, therefore providing a valuable primary source for the study of the 18th century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His diary, Yi-Jae-Ran-Go, contains his own views and experiences,
조선후기 천문역산학의 전개 과정은 時憲曆의 원리와 계산법을 습득하기 위한 고단한 여정의 연속이었다. 17세기 후반까지도 시헌력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淸과 조선의 역법 사이에 오차가 발생하였다. 숙종대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상감 관리를 청에 파견하여 역법을 배우고 그와 관련된 각종 참고서를 구입해 오게 하였다. 시헌력의 세부적 계산법을 습득하기 위한 조선 정부의 노력은 숙종대 전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시헌력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함께 서양식 天文儀器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었다. 숙종대에 추진된 각종 천문의기의 제작 사업은 서양식 천문의기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兩亂 이후 피폐화된 조선왕조의 천문의기를 개수하기 위하여 중국으로부터 서양의 앞선 천문의기 제작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숙종대에는 청에서 『儀象志』를 구입해 와서 관상감에서 간행하였고, 여러 가지 천문의기를 수입하였으며, 서양식 천문의기의 제작을
조선후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수많은 西學書가 전래되었다. 특히 淸 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17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수용된 서학서는 조선왕조의 지식인 사회에 “名卿碩儒들이 西洋書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西學熱’ 현상을 유발하기도 했다. 黃胤錫(1729∼1791)은 18세기 후반 조선사회에서의 서학서 유통 현황을 적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일기인 『頤齋亂藁』는 1738년(영조 14)부터 1791년(정조 15)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 그 안에는 經學, 史學, 天文曆算學, 地理學, 聲韻學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황윤석은 조선후기 정계의 집권세력인 西人-老論系의 일원이었으며, 당대 老論-洛論系의 宗匠인 金元行(1702∼1772)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그는 이와 같은 학맥을 바탕으로 당시 정계・학계의 주요 인물들과 풍부한 교유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科擧에 실패하고 薦擧를 통
The debates on the xuanji yuheng 璿璣玉衡 of the late Joseon dynasty had two different lines. The first was to regard it as an astronomical instrument, namely the armillary sphere (渾天儀), and to concentrate on analyzing its detailed structure. This line of the study again can be divided into two. The one was to restore the original instrument utilizing Zhu Xi's commentary. The other was to build a new kind of observational instruments based on Western astronomy that had been introduced in the late Jo
조선후기 西人—老論系를 대표로 하는 朱子道統主義者들은 兩亂 이후의 급격한 사회변동과 그에 따른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모순을 朱子學을 이념적 좌표로 삼아 보수ㆍ개량하고자 하였다. 宋時烈 이래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西人—老論—湖論系의 사상적 지향은 대개 그런 것이었다. 姜浩溥는 18세기에 바로 이와 같은 흐름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그의 학문적 목표는 宋時烈→權尙夏→韓元震으로 이어지는 노론—호론계의 학문적 성과를 계승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守師門說’을 바탕으로 각종 異端ㆍ異說을 辨斥하고 ‘朱子定論’을 확립하는 데 두어졌다. 그것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다종다양한 주자의 문장과 언설을 분류ㆍ종합하여 주제별로 정리하고 주자 학설의 ‘初晩同異’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朱子定論’을 확립하는 작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와 병행하여 주자학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었던 일체의 논의를 조목조목 비판ㆍ배격하는 것이었다. ‘朱子定論’을 확립하는 작업은 스승 韓元震과의 학문적 토론을 통
신경준은 조선 후기에 지리학 분야에서 방대한 업적을 남긴 학자이다. 그의 저작 가운데 『四沿考』와 『道路考』에는 조석 현상에 대한 논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東國文獻備考』 「輿地考」에 수록됨으로써 조선 후기의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신경준은 조석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지만 그의 논의에서 핵심적 사안은 朝鮮과 중국의 각 지역별 조석 시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내의 여러 자료를 활용해서 祖江 지역의 일별, 월별, 연별 조석 시각을 정리했고, 다양한 중국의 자료에서 浙江과 吳越 지역의 조석 시각을 수집하였다.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한 결과물이 「潮汐一朔進退盛衰之圖」인데, 이는 한 달 동안의 달의 위상 변화와 그에 따른 滿潮와 干潮 시각, 大潮와 小潮의 변화를 祖江, 浙江, 吳越, 濟州의 네 지역으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신경준의 조석설에서 특이한 대목 가운데 하나는 조석과 관련하여 기후의 영향을 고려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서도
세종대의 당면 과제는 유교적 ‘예악문물’(禮樂文物)의 정비였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학문에 대한 이론적 탐구를 수행하고 국책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실무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필요했다. 이에 세종은 학문 연구의 기반을 조성하고 연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작업에 착수했다. 그와 같은 작업이 이루어졌던 공간이 경연(經筵) 과 집현전(集賢殿)이었다. 양자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세종의재위 기간 동안 유교적 의례(儀禮)와 제도를 연구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세종은 집현전이라는 전문 기관을 통해 인재를 육성하고자 했다. 이전의 유명무실했던 집현전을 정비하고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젊은 문신들을 선발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게 함으로써 왕에게 자문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였던 것이다. 1420년에 집현전에 녹관(祿官) 을 설치하고, 그들에게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집현전의 정원은 10명에서 32명, 20명으로 때에 따라 변화가있었지만 그들에게 경연과 서연(書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