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kyu So
Hanyang University · 人文科学
研究室紹介
Professor Sun-kyu So's research focuses on early Joseon Dynasty administrative systems, particularly the evolution of local governance and tax collection mechanisms in Jeju Island, as well as the historical cartography and geographical perception of maritime territories such as Dokdo (Uldo). His work delves into institutional history, examining bureaucratic practices like the 'Jomok' (seating lists) and the role of scholarly elites ('seonbi') in shaping political and intellectual frameworks during the formative years of the Joseon state. He also critically analyzes historical texts, especially the 'Sejong Sillok Joriji,' to reassess territorial claims and historical cartographic conventions in East Asian maritime history.
Research Overview
Research Output Trend
Figures are computed from collected data and may differ slightly.
Selected Papers
9This study aimed to examine the reorganization and characteristics of collection system in Jeju Island in the late Goryeo and the early Joseon Dynasty. Jeju Island was incorporated into the provinces of Goryeo from the Goryeo Dynasty, but it was difficult to establish a stable collection system during the Goryeo period due to the complicated politics thereafter, and the full-scale reorganizatuion of Jeju’s collection system began in earnest after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The agricultu
조선시대 좌목(座目 또는 坐目)은 국가의 공식행사, 관서 내에서의 회합, 고을에서 열리는 향회 등의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명단 혹은 출석부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좌목의 기재 순서는 구성원들의 서열을 의미하였고, 관직, 신분, 나이 등 특정한 기준에 의해서 순서가 정해졌다. 그런데 좌목이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조선후기부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전기의 좌목은 그와는 다소 다른 용례로 사용되었다.<BR> 조선전기 좌목은 조정 내 당상관들의 서열을 기재한 명단이었다. 좌목은 세종 즉위 직후 부터 정비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당상관의 기준이 정3품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점차 기재대상이 당상관 이상으로 정착되어갔다. 순자법이 적용되지 않는 당상관 대상 인사 행정에서 좌목은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고, 때로는 관료제 시스템이나 국왕인사권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좌목의 운영 방식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조선전기 당상관 인사 관행의 일면을 살
This study aimed to examine the reorganization and characteristics of collection system in Jeju Island in the late Goryeo and the early Joseon Dynasty. Jeju Island was incorporated into the provinces of Goryeo from the Goryeo Dynasty, but it was difficult to establish a stable collection system during the Goryeo period due to the complicated politics thereafter, and the full-scale reorganizatuion of Jeju’s collection system began in earnest after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The agricultu
본고는 세종실록지리지를 대상으로, 해도(海島) 기술의 양상 및 인식의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오늘날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된 우산·무릉 두섬에 대한 기사는 한국의 독도영유권 주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기사 내용을 둘러싼 비판과 반론만이 중요하게 이루어져 왔다. 정작 세종실록지리지 전체의 맥락에서 해도는 어떻게 기술되어 있고, 또 어떠한 해도들이 수록되었는가의 문제는 심각하게 고려된 바가 없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어떠한 섬을, 어떠한 방식으로 기재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먼저 파악한 이후 해당 맥락에서 우산·무릉 두 섬에 대한 기재 내용을 확인할 때, 당대의 시각에서 우산·무릉도가 어떠한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이러한 작업은 비단 우산·무릉도 기사 내용의 검토뿐 아니라, 조선 전기 시기 해양 및 섬에 대한 인식이란 보다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서도 일정한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본 연구는 정도전이 생각하는 선비란 누구이며, 어떠한 존재인가를 정리하고, 그러한 선비론이 그가 살았던 시대적 맥락에서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그간 정도전의 연구는 주로 조선건국과 직결되는 정치사상, 제도개혁 등에 집중되어 왔으며, 그 내용들은 비단 정도전 개인에 대한 연구일 뿐 아니라 조선 건국 세력의 정치사상과 지향점을 대표하는 내용으로 인식되어 왔다. 본 연구는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정도전 개인의 사상을 여말선초 사회를 이해하는 단초로 보고 연구를 진행하고자하였다. 정도전의 선비론은 조선시대 일반적인 지식인들과 큰 틀에서는 비슷한 특징을가졌으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차이점도 존재하였다. 선비를 사족, 양반의 입장에서 파악한 조선시대 지식인들과 달리 정도전은 선비를 공경대부와 일반 피지배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계층으로 파악하고, 일반적인 관료와도 구분되는 존재로 인식하였다. 아울러 선비의 학문에 있어서도 소위 ‘잡학’이란 이름으로 범주화되는 천문, 지리, 음양
이 글은 최근 일본의 외무성에서 운영하는 ‘다카시마 연구·해설 사이트’ 에 게재된 쓰카모토 다카시(塚本孝) 교수의 글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은 죽도일까?」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기 위한 것이다. 해당 글에서 쓰카모토는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섬을 기술할 때에는 육지와의 거리를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따라서 한국 정부나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세종실록』 「지리지」에 표기된 우산도(우산도)는 현재의 독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계승된다고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쓰카모토가 주장하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섬 기술원칙이 사실인지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종실록』 「지리지」에표기된 우산도와 무릉도 기사를 정합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하였다. 또한쓰카모토가 『세종실록』 「지리지」의 우산도 및 무릉도 기술 일부가 계승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분도 검토해 보았다. 쓰카모토가 주장하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섬 기
본 연구는 전근대 한국 재정사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조용조 체제’ 란 용어의 적절성을 검토하고, 아울러 그러한 역사적 용어가 사용된 맥락을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조용조는 중국 당나라에서 사용된 수취체제로, 성인 남성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분급하고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토지, 호, 인정에 대해 수세한 제도였다. 토지, 호, 인정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성인 남성이 일정량의 토지를 받는 것을 전제한 것이어서, 철저히 인정세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한국사의 경우, 고대사부터 대동법이 시행되기 이전 조선전기까지, 수취체제를 총괄하는 용어로 ‘조용조’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실제 시행되었던 수취제도를 살펴보면 당나라의 조용조와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각 시기별 수취체제는 모두 조용조란 이름으로 총괄되었고, 한국 전근대사 수취체제를 총괄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왜, 어떠한 맥락에서 생겨난 것인지 살펴보았다. 삼국시대 중국의 제도 수입 과정
12세기 이후 고려사회에는 貢戶라 불리는 존재들이 등장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들이 12세기 대량으로 발생한 유망민들을 현적지 기준으로 호적에 등재하고, 수세 대상으로 파악한 존재라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신분이나 부세 부담의 양상은 白丁 농민과 다를 것 없이 설명되었다. 일부에서는 수세 대상이 되는 민을 모두 貢戶로 편성하는 ‘貢戶制’ 가 시행되었다고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자료에서 貢戶의 성격을 고찰해 보면, 이들이 일반 백정과 달리 定役戶로서 특정 물자를 생산하여 納貢하거나, 특정 귀속처에 入役하는 존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의 신분은 일반 양인에 비하여 다소 낮은 신분, 즉 賤事・賤役良人의 범주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2세기 대규모 유망민들의 발생과 더불어 부곡제 지역의 해체가 급속화되면서, 특정 물자 생산을 위해 국가가 공호를 편성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의 부곡제 지역의 특정한 국역부담호와 동일한 존재로 동화되어갔다. 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