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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교수

Hyesun Park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연구실 소개

박현숙 교수의 연구는 고대 한국사의 정치사적 맥락과 문화적 유산을 중심으로, 특히 백제의 왕권 정당성, 불교 사찰의 건립 배경, 역사지리적 접경 문제, 그리고 역사교수법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시각에서 고대 국가의 통치 구조와 사료 해석의 정교함을 탐구한다.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정본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실의 재구성과, 역사 교육 현장에서의 지식 전달 방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고대사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일본학자 투다 유마키의 사료비판적 사고와 그가 제기한 동아시아사 인식의 문제성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비판적 분석을 시도한다.

백제사역사지리불교사찰사료비판역사교육지식

연구 현황

논문 수
56
총 인용 수
299
최근 5년 논문
11
주요 분야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5개년 연도별 논문 게재 수
11총합
2022
2023
2024
2025
2026
5개년 연도별 피인용 수
25총합
20222023202420252026

주요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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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문|인용수 54·2009
百濟 武王의 益山 경영과 彌勒寺
박현숙

In Korean scholarship, there have been a great deal of studies on the strategic development of Iksan(益山) by King Mu(武王:600-640) of Paekche(百濟) and the construction of the Mireuk Temple(彌勒 寺). The recent discovery of Kûmjesriibong’an’gi(金製舍利奉安記:The Record of the Relics in the Golden Epitaph), in which 193 characters were inscribed, at the Western Pagoda of the Mireuk Temple in January, 2009 provides a concrete picture where the regality of King Mu, the influence of the Sat’aek family(沙宅氏) , th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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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20·2010
5~6세기 삼국의 접경에 대한 역사지리적 접근
박현숙

본고는 역사지리적 맥락에서 삼국의 접경 문제를 살펴보았다. 5세기 초~중기 고구려 · 백제와 관련해서는 한강 유역이 중요시 되었다. 5세기 초 고구려는 충주를 중심으로 남한강 유역과 북한강 유역의 루트를 확보하고 있었다. 5세기 중엽 이후 삼국의 접경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한강 유역의 영유 문제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지리지는 서로 다른 시기의 상황을 시점으로 하면서도이를 평면적으로 나누고 있어서, 삼국의 영역을 둘러싼 다양한 변화상을 담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삼국사기』지리지에 보이는 한반도 중부지역에 설치된 고구려의 군현 관련 자료를 통해 고구려가 이 지역을 일찍이 지배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475년 고구려의 한성 강습 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기 보다는 백제의 완충지대 또는 접경지대였다고 파악된다. 한편, 5세기 중~말기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과 관련해서는 신라가 471에 축성한 삼년산성(충북 보은)이 주목된다. 신라는 보은 지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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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18·2005
백제 建國神話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
박현숙
4
논문|인용수 16·2011
百濟 熊津時期의 정국과 大通寺 창건
박현숙

Daetongsa is one of the Buddhist temples of Paekche whose date of foundation and relevant information are well preserved. This paper examines, based on the records of Samguk Yusa, the history of the foundation of the Buddhist temple and its meaning in the context of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Ungjin period and Paekche’s close ties to Yang(梁). Paekche had dynamic relations, both political and cultural, with Yang. King Muryeong(武寧) and King Seong(聖) dispatched envoys to Yang, namely the Southe

5
논문|인용수 13·2009
津田左右吉의 단일민족설과 고대 한·일 민족관계 인식
박현숙

津田左右吉의 일본사 연구는 ‘津田 史學’, ‘津田 思想史學’으로 불리우면서, 메이지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학계에서 第一人者로 자리잡고 있다. 津田의 학문적 업적은 문헌고증학적 연구, 일본 고전의 비판적 연구, 국민사상사 연구, 중국 고대 사상사 연구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본고에서는 그의 일본 고전의 비판적 연구와 이를 통한 한ㆍ일 관계사 인식 및 한국 고대사 왜곡 문제 등을 검토해 보았다. 津田 史學의 특징은 당시 새로이 유행하고 있었던 민속학과 유물사관적 역사연구 방법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는 점에 있다. 그의 상대사 연구의 출발점은《古事記》와 《日本書紀》에 대한 철저한 사료 비판이었다. 그리고 津田가 그리고 있었던 동아시아상 형성에 단일민족설이 자리잡고 있었다. 津田는 평화적, 무권력적인 단일민족 국가를 理想으로 삼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津田의 사상은 1905년의 러일전쟁과 1910년의 한일합병이라는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었다. 津田는 '記ㆍ紀’神話의 분석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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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12·2016
3~4세기 백제의 대외관계와 왕권의 추이
박현숙

본고는 왕권의 대내적인 성장의 모습보다는 전쟁 및 외교와 교역 등 대외관계의 측면에서 3~4세기 백제의 대외관계와 왕권의 추이와 성장 과정에 대해 고찰하였다. 전쟁 및 외교와 교역 등 대외관계는 왕권의 표상과 성장에 긴밀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전쟁 수행을 통해 백제 왕은 대내적으로 고도의 적응력이 있는 관리자로서의 기능을 제공받았을 뿐 아니라, 획득한 인적·물적 자원을 토대로 왕권으로 대표되는 중앙의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국가 간의 외교와 이로 인한 교역은 물질적 물품 교환뿐만 아니라, 가치·상징체계·문화적 자극 등 추상적 정보까지도 교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변화와 성장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능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축적된 富와 情報는 정치체를 통합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도구로 작용하였다. 3세기 이전 백제는 마한 사회의 외곽에서 중국 군현의 직·간접적인 공격에 저항하는 한편으로, 교역의 이익과 그 선진문물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 나갔다. 온조왕 이후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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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12·2009
고등학교역사교사의 내용지식과 교수내용지식에대한탐색
박현숙, 허은
역사교육연구

본 연구는 역사교사에 따라 내용지식과 교수내용지식의 특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고등학 교 교사 3명을 대상으로 문화기술적 연구방법 (ethnographic researchmethod)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관찰한 것이다. 논의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역사교사는 수업에 필요한 내용지식을 서적, 대학교 강의, 동료 수업 참관을 통해 습득하 고 있었다. 내용지식은 역사적 사실이나 개념을 정확하게 가르치고, 전후관계를 통해 역사 흐름을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다양한 예시나 이야기거리 등 수업의 설명에 필 요한 소재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역사교사가 역사교육의 목적과 수업의 방향을 어떻 게 설정했느냐에 따라 교사 내용지식의 양과 질의 정도에서 차이가 났다. 역사교사는 내용지식을 통한 교과 내용의 이해에 있어서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는 주요 내용과 개념을 참조하였다. 역사교사는 교과서의 내용이나 구성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견해 를 가지고 있었는데, 경력이 많은 교사일수록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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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12·2007
백제 한성시기 流民의 발생과 對民支配의 양상
박현숙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중심으로 관련 사료를 살펴 본 결과, 정치적인 망명을 제외하고 주로 가뭄이나 홍수, 질병, 병충해 또는 전쟁으로 인한 고역 등으로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받지 못할 때 流亡이 일어났다. 유망에 의해 발생한 유민은 부랑집단이 되기도 했고, 도적이 되어 국가의 통치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나 신라로 越境해 가는 이들도 있었다. 유민의 발생은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파악 내지 통제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조세와 역역의 원천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성시기 백제 국가는 재생산 기반을 지원하는 진휼책과 권농책, 그리고 직접적인 혜택으로써 농민의 조세 부담을 경감하는 조세 경감책, 영역 확인과 백성들의 위무를 겸한 巡撫 등을 통해 백성을 구휼하고 위무했다. 또한 수취체제와 지방통치 제도의 정비를 통해 백성에 대한 파악과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유민의 발생을 방지하고 백성의 생산기반을 안정시킴으로써 지속적인 조세 수입원의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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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10·2017
외교문서를 통해 본 후백제와 일본의 외교 양상
박현숙

후백제 견훤이 922년과 929년에 일본에 使者를 파견하여 通交하려는 뜻을 전한 ‘牒’을 국가 간의 외교문서라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았다. 후백제와 일본 사이의 通交가 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일본 측의 배경과 후백제 견훤의 對日外交의 목적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922년 후백제 사신이 대마도를 거쳐 大宰府에 와서 ‘牒’과 ‘方物’을 바친 내용이 『本朝文粹』의 ‘大宰答新羅返牒’으로 전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견훤은 ‘一千年之盟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백제의 선례에 따라 일본과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뜻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朝覲의 禮는 陪臣이 행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명분으로 후백제와의 첫 통교를 거절하였다. 이에 견훤은 929년에 다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기록은 『扶桑略記』에 전한다. 그러나 후백제 사신에 대한 태정관의 조치는 지난번과 같이 사신 일행을 추방한 것이었다. 후백제의 922년과 929년의 對일본 통교가 실패로 끝난 일본 측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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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9·2014
백제 太學의 설립과 정비 과정
박현숙

백제 교육기관의 명칭이나 교육 내용에 대해서는 그 동안 명확히 말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관련 사료가 부족하여 관학의 정확한 명칭이나 그 교육 내용을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2년에 중국에서 백제 유민인 陳法子의 墓誌가 소개되면서, 백제 위덕왕 시기에 官學으로서 ‘太學’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태학의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사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파악해 볼 수 있다. 관학이 출현할 수 있는 중앙집권화의 확립과 관료체제의 성립, 그리고 유교를 통치원리로 하는 역사편찬의 시기가 近肖古王代이므로, 이 때에 태학이 설립되었다고 생각된다. 근초고왕대에 설립된 태학에서는 博士가 공식적인 제도상의 敎授官으로서 弟子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 武寧王과 聖王代에는 倭國에 五經博士를 주기적으로 파견하였다. 이는 백제에서 태학 교육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무령왕대에 오경박사제가 마련됨으로써 백제의 유학 연구와 교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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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8·2017
한성시기 백제의 宋・北魏와의 외교 배경과 그 양상
박현숙

372년 1월에 백제와 동진의 첫 교섭이 이루어진다. 근초고왕 이후 한성 백제의 대중관계는 남조의 東晋과 宋으로 일원화되며, 이후에도 남조와의 외교는 백제 외교의 기본노선이 되었다. 백제가 남조와 통교한 것은 동진과 宋 등이 산동반도까지 진출해 와서 백제-산동-강남으로 이어지는 연결루트가 확보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동진과의 외교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조공책봉 관계였으나, 왕권의 안정과 백제의 국제적 위상 정립에 기여하였다. 동진과의 교섭은 근초고왕 27년(372)년에서 진사왕 2년(386)까지 빈번하다가 백제가 396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국가적 위기에 놓이자, 20여 년간 단절된 뒤 다시 406년에 재개된다. 단절의 시기 동안 백제 아신왕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며 왜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宋과의 외교관계는 60년 동안 18회로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에 걸쳐 백제의 對宋外交가 집중적으로 추진되었다. 의례적인 조공책봉과 더불어 백제에서는 현실적으로 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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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7·2015
2009 개정 교육과정 중학교 『역사(1)』 교과서의 백제사 쟁점에 대한 서술 검토
박현숙

역사교과서에 대한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 의한 현행(2015년 발행) 중학교 『역사(1)』 교과서의 한국고대사 내용을 백제사 쟁점 중심으로 검토해 보았다. 먼저 백제 국가 형성과 관련된 백제국의 출자 문제는 크게 고구려 유ㆍ이민 설과 부여계 고구려 유ㆍ이민 설로 나뉘어졌다.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부여계 고구려 유ㆍ이민설’을 따르는 서술이 이후의 백제사 전개를 이해하는데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한성시대 도성인 하남위례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교과서가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구별하지 않고 서술하고 있었다. 또한 하남위례성(한성)의 경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로써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고 있는데, 대부분의 교과서가 이 부분에 대해 불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보완이 필요하다. 한편, 거의 모든 교과서가 요서진출설을 조심스럽게 서술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에서는 일본이나 산동지역은 ‘교류’로, 요서지역은 ‘진출’로 표시하고 있다. 여전히 ‘진출’과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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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7·1996
백제 泗沘時代의 지방통치체제 연구
박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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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6·2006
6세기 백제와 일본의 문물 교류와 그 배경
박현숙

본고에서는 6세기 백제와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를 양국 사이에 이루어진 문물교류의 양상을 통해 천착해 보았다. 사료가 보여주듯이, 일본이 군사 등의 병력과 말, 배, 활, 화살 등 군수물자를 보낸 것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백제의 요구 때문이었다. 일본의 군원 지원에 대해 백제는 선진문물을 보냈다.한반도 내에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 백제는 對일본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6세기 일본도 5세기 후반 이후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대외창구로 한반도, 특히 4세기 이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백제가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선진 문물의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서 일본은 한반도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백제 역시 고구려ㆍ신라ㆍ가야와의 역관계 속에서 중국이나 일본 관계를 유리하게 전개하여 자국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백제의 선진문물에 대한 대가로서, 일본은 백제의 對高句麗戰과 新羅戰을 위하여 군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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