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식 교수
Il Sik Ha
연세대학교 사학과
연구실 소개
하일식 교수의 연구실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르는 지방제도와 지배체제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며, 지방세력의 실질적 지배 역할과 중앙집권체제의 유연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수행합니다. 특히 왕경 중심의 기록 외부에 존재하는 지방의 역사적 실상과, 귀족·지방관·촌락 주민 등 다양한 사회 계층 간의 권력 관계를 비문, 유물, 교과서 자료 등을 통해 재구성합니다. 연구는 역사적 자료의 해석과 신뢰성 확보에도 깊이 관여해, 교과서의 서술 오류나 고대 문서의 인쇄 기록 등 실증적 연구와도 연결됩니다.
연구 현황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요 논문
15중성리비가 만들어진 연도는 501년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60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열어두고 계속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비문은 문단을 나누고 동사와 고유명사를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내용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 러 가설들이 다양하게 제출되고 있다. 이 비문이 어떤 분쟁을 판결한 내용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일치한 다. 필자는 이 비문에 나타난 판결의 내용을 먼저 생각해보았다. 다음에는 분쟁에 관 련된 사람들을 분석하여 분쟁의 양상과 분쟁의 대상을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뭔가 를 뺏았다가 되돌려준 쪽은 왕경에 거주하는 두 귀족 가문이었고, 되찾은 쪽은 지방 촌락의 주민 및 왕경의 다른 귀족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분쟁의 대상은 흥해 지방 의 토지 또는 그 토지로부터 수익을 얻어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닐까 생각하였다. 이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는, 왕경의 권리 보유자와 그 집행자, 그리고 지방의 토지 소 유자와 경작자, 지방관과 그를 보좌하는 현지
5세기 말 이후 신라 왕경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주변 小國의 지배층 일부가 왕경으로 이주하고, 전국의 財貨들도 왕경에 집중되었다. 인구와 재화의 분산이 필요했다. 신라는 지방에 小京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삼국통일 이후에 5개 소경을 갖추었다. 6세기 초부터 설치된 소경에는 왕경인의 일부가 집단 이주했고, 다른 지방의 주민들이 徙民되는 경우도 있었다. 왕경 중심부의 공간 부족은 지배층 일부의 거주지를 경주 외곽으로 확산시켰다. 일부 귀족들은 소경을 비롯해서 州·郡으로 이주하였다. 필자는 이렇게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긴 왕경 귀족들의 신분 변화가 있었는지, 編籍地까지 지방으로 바뀌었는지를 검토하였다. 신라 귀족들은 왕경을 떠나 小京이나 州・郡 어디서 살든 여전히 왕경인이었다. 거주지를 옮겨 여러 세대가 지나더라도 왕경에 있는 6部 중 하나에 戶籍을 올려두고 있었다. 編籍地를 왕경으로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骨品과 특권을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신라 왕경에
이 글은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 사회가 연속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를 지방세력과 지방제도를 중심으로 살핀 시론이다. 신라는 정치체제나 신분제에서 객관적인 모순이 내재된 사회였다. 그러나 그 지배체제가 무너지는 직접 계기는 장기간의 자연재해가 일차적이었다. 왕경 중심의 문헌사료에 보이지 않았지만, 지방세력은 오랜기간 향촌사회의 실질적 지배자로 존재해왔고, 신라 말의 혼란기에 본격적인 활동을 보인 존재였다. 새로운 사회경제 구조를 바탕으로 등장한 새 계급은 아니었다. 이들은 신라 말의 혼란기에 자치조직을 이끌다가 후삼국, 고려로 이어진 존재였다. 신라 군현제가 무너지고 호족의 시대가 되면서 군현명칭이 인플레되었고, 이를 다시 위계서열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 왕조는 이를 적극 추진하지 못했는데, 지방사회의 지배층과 실무자들이 집권국가의 운영에 요구되는 여러 기능들을 차질없이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골품제가 사라진 집권체제에 적응하였다. 따라서 신라
2011년부터 사용된 새 중학교 『역사』 교과서는 짧은 기간에 만들어졌다. 그런 만큼 적지 않은 오류와 무리한 서술이 보인다. 검인정인 만큼 서술에 허용되는 최소한의 자율성이 생긴 반면에, 책마다 서술 기준이 균일하지 않다. 매우 작은 사실까지 서술한 책이 있는가 하면, 시간 순서를 혼란스럽게 서술한 문장도 더러 보인다. 또한, 오래된 학설로서 현재 학계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전제왕권’이라는 용어가 대부분의 책들에서 여전히 사용된 것도 유감스럽다. 유적 사진, 유물 사진을 잘못 선택한 경우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사진에 덧붙인 캡션에서 중대한 오류를 저지른 책들도 더러 있다. 삽화를 넣은 책들이 많은데, 역사적 실상에 부합되지 않게 그린 것들이 많다. 이런 오류들은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In the early days, Korean school textbooks were originally published through a system of official approvals and sanctions. However, in 1974 the Park Jeong-hi administration replaced that process with a governmental designation system. In order to fortify his dictatorial power, Park Jeong-hi sought for a ‘re-education of the people,’ designed to create an obedient citizen populace. As such, he established the Charter of National Education, and demanded the students to memorize it. The dictatorial
『삼국유사』 파른본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파른본은 조선 중종 때 출판된 임신본(1512)보다 앞서 조선 초기에 板刻하여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파른본과 임신본을 대조하면, 임신본은 파른본 계통의 책자를 해체하여 木板에 뒤짚어 붙인 뒤에 글자를 새겨 인쇄한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자획의 각도와 획 사이의 공간 등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른본과 임신본의 王曆은 기이편과 별도로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신본 왕력은 파른본 계열을 참고했지만 꼭 같지는 않다. 왕력을 몇 군데 분석하면, 파른본보다 앞선 시기에 인쇄된 『삼국유사』가 존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파른본과 임신본의 왕력을 비교하면, 파른본이 더 분명한 사실을 간직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두 책자의 왕력에 보이는 글자들의 차이는 木板에 새기는 과정에서 생긴 실수와 착각으로 판단되는 경우도 많다. 앞으로 더욱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7세기 중반에 성골이 소멸하자 골품제는 진골과 6개 두품 등 모두 7등급 신분이 남았다. 그런데 9세기 후반 「낭혜화상비」에는 득난이 독립된 새 신분층으로 확인된다. 과거 연구들은 이 득난을 반란에 연루되는 등의 정치적 계기로 생겨난 예외적 신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득난 신분은 진골이 그 아래 신분과 혼인하여 태어난 자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골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런 자식들을 곧바로 6두품으로 대우하기 어려웠다. 이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득난은 하나의 독립된 신분처럼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다만, 득난 신분은 기존의 골품 등급에 관한 법제를 수정하면서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다. 관행적으로 진골보다 낮고 6두품과는 구별되는 신분이었다. 그래서 신라 지배층은 이들을 대상으로 아찬 중위를 설정하였다. 아찬 중위가 확인되는 금석문은 8세기 초이다. 따라서 득난 신분이 출현한 시기는 7세기로까지 소급하여 생각할 수 있다.
This paper was prepared to accommodate the results of the close re-reading of Byungjin inscriptions of the Chungje Stele. By adjusting previous readings and newly deciphering some characters, updated interpretation became possible. The research re-examined the conclusion made few years ago from the analysis of Jungwon Inscription. Such efforts led to believe that the location area of the Chungje Stele was royal land, constantly from early 6th century to the end of 8th century. This was the disti
Gamak Mountain stele(紺岳山碑) looks similar to Silla monument in commemoration of King Chinhŭng's tour, which occasionally led to the argument that it was erected during the King Chinhŭng's reign. Recently, some claimed to have read the letters, but it is a subjective judgement. The stele’s surface is so damaged that the letters cannot be identified. The Gamak Mountain was the place for a state memorial service during the dynastic period.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Gamak shrine(紺岳神祠) was rebu
The Uljin Bongpyeong-bi monument was found in 1989. After the initial founding, it was moved from the site on an excavator, and it was then when a portion of the monument located in the lower section of the monument’s right side was damaged. A piece with several letters on it was detached from the main body. A few days later, the piece was retrieved and now it is glued on to the monument in its original location. And two decades later, it was newly suggested that at the end of line No.1 there se
처음 세워진 곳을 떠나서, 조선시대 관청 부근에서 발견된 고대 비석들이 많다. 조선후기에 금석문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 관리들이 옮긴 것이다. 관청이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양 신라적성비, 울진 봉평리신라비, 충주고구려비 등은 원래 위치에서 발견되었다. 이들 비문의 내용은 문서로 먼저 작성되었지만, 별도의 비석을 세운 이유가 있었다. 오래 기억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며, 착오가 없도록 할 목적이었다. 예상독자와 기대효과를 생각하면 가장 적당한 위치를 선택하여 비석을 세워야 했다. 포항 중성리신라비와 포항 냉수리신라비도 처음 세운 장소에서 발견된 경우이다. 이들 비석은 분쟁을 판정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강조한 내용이다. 당시의 주변 환경으로 보아 이 분쟁은 농경지, 또는 숲에서 나오는 땔감으로부터 얻는 수익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소유권이 아니며, 장기간 수익을 얻도록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권리였다고 추정된다.
This study was conducted with detailed analysis on the contents of the stone tablets of Gwanmun Fortress after its re-decipherment. The results estimated the dates of the tablet to be around the late 7th to early 8th century. The labor mobilization occurred during these times of stability in Shilla's ruling structure. During the Unified Shilla period, members of tax-villages(食邑) were mobilized in an administratively independent manner (identical to those of prefectures or counties) to meet the c
강진 무위사에 있는 선각대사비에는 독특한 내용이 담겼다. 다른 선사비들에서 볼 수 없는, 궁예 말년의 狂氣와 잔인성을 잘 드러낸 서술이 있다. 그러나 그동안 판독이 불완전했고, 내용을 해석하는데도 혼란이 있었다. 나는 판독을 전면 재검토하고, 아울러 비문 문장도 다시 해석했다. 최언위는 현재 국왕인 왕건의 과거 활동을 서술하며 大王이라고 표현했다. 시간을 소급한 것이다. 배 위에서 선각대사를 만날 때, 처형 직전에 선각대사를 변호하는 글을 보낼 때 모두 왕건을 대왕이라 표현했다. 임금의 명령을 받든다는 奉制, 임금의 서한을 뜻하는 丹詔 등도 그렇다. 그리고 현 시점의 왕건을 今上이라 칭했다. 반면 궁예는 前主로 표현되었다. 선각대사를 취조하는 장면에서 궁예를 主上이라 표현한 구절이 있다. 궁예가 쫓겨나기 전에 선각대사의 제자들이 작성한 行狀에서 그대로 옮긴 탓이다. 최언위는 왕건이 즉위하여 개성으로 수도를 옮긴 18년 뒤에 개성으로 와서 왕건의 신하가 되었다. 그래서 당시 상황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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