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현 교수
Kyung-hyeon Min
고려대학교 사학과 · 사회과학
연구실 소개
민경현 교수의 연구실은 19세기 동아시아 외교사와 러시아 제국의 대외정책, 특히 조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사 연구를 핵심으로 한다. 러시아-조선 수호조약, 러일전쟁 시기의 외교 전략, 그리고 한국 내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역사까지 다변화된 주제를 통해 식민지 이전부터 식민지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외부 세력 간 영향력 경쟁과 종교·민족·국가 정체성의 얽힘을 분석한다. 특히 외교 문서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정밀한 역사적 분석과, 문화적·정치적 공간이 어떻게 실존적 갈등과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춘다.
연구 현황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요 논문
15본 논문은 19세기 후반 러시아제국의 조선 정책을 시기별로 연구했고 1884년 조선과 러시아가 체결한 조러수호조약을 조영조약과 비교를 통하여 분석했다. 조선과 러시아가 인접국가가 된 1860년부터 1870년대 초까지 조선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주요 정책은 한반도에서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고, 1876년 일본 정부가 조선 정부에 수호통상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이 자본주의 열강에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을 열어놓았을 때에도 조선에 대한 러시아 외무부의 정책 기조는 여전히 관망정책이었다. 그러나 서양의 열강들이 조선에 진출하는 시기부터 러시아 외무부는 조선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조선이 서양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방해했고, 그럼으로써 한반도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 러시아 외무부의 가장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는 미국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방지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 외무부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 정부는 서양 열강
한국 러시아정교회 실질적인 선교는 1900년 2월 흐리산프 솃콥스키(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 신부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예배를 시행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 러시아정교회는 러일전쟁, 한일강제병합, 러시아 혁명과 내전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도 중단없이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정교회는 주한 러시아 교민사회와 밀접한 연계를 유지했고, 이는 정교회의 진로가 러시아 교민사회의 향방에 좌우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 예로 백군파 러시아인들이 교민사회의 주축을 이룬 1920년대는 정교회가 반공을 기치로 내걸어 소련총영사관과 대립했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이 승전국이 되어 주한 러시아 교민사회와 관계가 개선되자 정교회는 소련 총영사관과 교류를 시작하기도 했다. 앞의 경우는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존속에 이바지했으나, 후자의 경우는 미군정과 남한 정부의 의심과 반감을 초래하여 1948년 12월 폴리카르프 프리마크(Поликарп Прийм
日露戦争時期、韓国に対する日本の外交目的は単純に利権を拡大する次元を越えて韓国を日本の保護国とすることにあった。こうした外交目標はロシアとの戦争を通してその達成時期が急速に短縮されたばかりではなく、終戦の時には韓国を日本の規定するところまで進展した。特に過程において講和協商を仲裁した米国は日本の立場を積極的に支持した。こうした国際的な世論を背景にして日本はポーツマス講和会談においてロシアを強く押し立てることが出来た。ロシアの協商代表ビーテは韓国の主権を保証する装置を挿入しようと努めたが、小村代表の強い反発に当たって結局韓国に関した条項は日本の主張が主に反映されるようになった。
The study defines Russian director Vitaly Mansky’s documentary film “Under the Sun, 2016” as a totalitarian North Korean theater country and analyzes the reality of grotesque. The direct background of writing the paper was that grotesque had various implications, but there were not many specific studies that applied it to North Korean films. Under the Sun, 2016, which is the main ingredient of the study, is a documentary film that exposed the madness of North Korean totalitarianism during a year
Bohai (698 A.D. – 926 A.D.) was a medieval state in East Asia. The Tang Empire in 713 recognized Bohai and considered this state as kingdom from the 760s. However, the status of Bohai was unclear. Although Bohai was a formal vassal of the Tang Empire, it followed its own independent path, not only in its internal policies, but also in its foreign relations. Furthermore, it regarded itself as an empire. The provincial system of Bohai imitated an imperial system, but the status of provincial power
이 연구에서는 1880년대 체임벌린의 서한 발행을 전후하여 영국 도시의 주도 하에 진행한 실업자 구제 사업의 내용을 알아보고, 실업문제가 도시 공간에 투영되는 현상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중부 산업도시인 노팅엄의 사례를 다룬다. 노팅엄에서는 1884-85년에 걸쳐 시의 실업자 구제 사업이 시행되었으며, 1895-96년에는 시장 특별기금이 설립되었다. 이 같은 노팅엄의 실업 타개 노력은 버밍엄, 글래스고와 함께 1880년대 중반과 1890년대 초 중반에 걸친 불황기에 시 자치체와 대규모 자선단체가 주도하여 적극적인 실업 관련 구호사업을 벌인 지방도시의 전형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특히 1884-85년의 노팅엄 실업자 구제 사업과 뒤이은 1885년 헝거힐 가든 습격 사건을 중심으로 경기침체를 겪는 영국의 중부 산업도시의 실업문제와 그 해결 과정에서 도시라는 공간이 서로 다른 층위의 도시민들에 의해 얼마나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는가의 문제, 또 이 속에서 도시민
Alexander Kim, Min Kyounghyoun, The Problem of the Ethnic Composition of the Bohai State – A Comparative Analysis of Russian and Korean Materials, Central Asiatic Journal, Vol. 58, No. 1-2, The Manchus and “Tartar” Identity in the Chinese Empire (2015), pp. 7-15
This paper analyses the existing literature and inquires the way in which the Soviet-Japanese War contributed to the establishment of DPRK. The period after that war witnessed the following historical events in the Korean-Russian relations: the independence of Korean peninsula, military governments and the division of peninsula, the Moscow Conference and the division, democratic reforms including the land reform in the North, the foundation of the Labour Party of North Korea, enactment of consti
If there had been no division of the peninsula, then there would have been no war.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as was in the case of the Korean War, was decided in accordance with the strategic interests and the geopolitical calculations of the Great Powers that surrounded Korea with no consideration of the opinions of the Koreans themselves. It will therefore be difficult to approach the fundamental issues surrounding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without understanding the Kore
냉전 시기 일본과 한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으로 이끈 것이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라는 미국발 담론이 유포되었다. 이에 의하면 소련의 역할은 미국이 일본과 치른 전쟁에 참전했을 뿐, 부차적이었다. 이른바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극동에서 이권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증대하려는 팽창주의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은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자 전쟁 준비가 덜 끝났는데도 일본이 미리 미국에 항복함으로써 얄타협정에서 보장된 자국의 이권이 물거품이 될까 우려하여 개전일자를 앞당겼던 존재로 인식되었다. 소일전쟁에 관하여 소련 측 연구는 이와 다르게 평가한다. 소련군의 관동군 격파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을 가져다준 직접적인 요인이고, 미국의 원폭 투하와 관련해서는 “순수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도시와 주민의 말살이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고 해석이다. 소련이 법적으로 만료되기 전 중립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에
En russie, pour la modernite et pour le developpement, quel etait le choix des russes, et quelle etait l'alternative. Passer a la realisation du projet marxien de revolution communiste en trouvant les formes pratiques non prevues par le projet lui-meme | la difficulte reelle residait non pas dans le fait de prendre le pouvoir mais dand celui de le conserver. Boukharine, l'ancien partisan de la guerre revolutionnaire en 1917, souleve d'enthousiasme par la perspective de la revolution en allemagne
대표 연구 분야
민경현 교수의 연구를 Nubint에서 더 깊이 살펴보세요
이 연구실의 논문을 앱에서 열어 AI와 함께 읽고, 핵심을 요약하고, 내 글에 인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