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철 교수
Park In-Cheol
경희대학교 철학과
연구실 소개
박인철 교수의 연구실은 현상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인간 간의 상호주관적 관계, 타자성, 공감의 윤리적 기반을 탐구합니다. 특히 후설의 타자경험 이론과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 철학을 비교·해석하며, 상호문화성과 낯설음의 철학적 의미를 현상학적 틀에서 재구성합니다. 인간의 감성적·윤리적 실천이 세계 이해와 사회통합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추구합니다.
연구 현황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요 논문
15공감에 대한 논의는 최근에 심리학계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방대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적인 공감이해는 공감을 주체와 주체간의 상호주관적, 인격적 관계로 보는 데에 한계를 노출한다. 이는 결국 공감의 윤리적 성격에 대한 통찰의 부족으로 이어진다. 이에 반해 현상학은 기본적으로 주관성에 기반을 두고 주관과 객관의 긴밀한 상관성을 다루기 때문에, 나와 타인 간의 공감적 관계를 주체와 주체간의 상호주관적 관계로 본다. 이런 맥락에서 현상학은 공감현상을 단순한 사실적인 작용으로서만이 아니라, 타인을 나와 같은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인정하게 되는 과정 내지 계기로 이해한다. 바로 이러한 타인에 대한 의미부여에서 공감이 지닌 윤리적 성격이 드러나며, 그런 한에서 윤리성은 공감의 본질적인 요소임이 밝혀진다. 현상학적 공감이해는 곧 공감의 윤리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후설은 그의 감정이입적 타인경험론에서 이러한 공감의 특성을 그 형식적 구조의 면에서 잘 보여주고
글은 하버마스와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의 비교를 통해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개념의 일면성을 드러내는 데에 초점이 있다. 하버마스는 후설의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 개념을 수용하면서 이를 의사소통적 행위와 결부시켜 재해석한다. 그러나 이렇게 재해석된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개념은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이 지니고 있는 구체성과 포괄성 그리고 개방성의 측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하나의 형식적 개념으로 그치고 만다. 이는 하버마스가 후설의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가 함축하고 있는 주관과 세계의 다양한 상관관계의 층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채 오직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측면에서 합리적이고 형식화된 생활세계의 단면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생활세계적 주체의 성격을 의사소통 행위자로 한정해 지나치게 단순하게 바라본 데에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 특히 주체의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바로 이러한 주체의 성격에 대한 평면적 이해는 결국 그의 사회이론 자체의 결
최근에 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상호문화성’이라는 주제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소통과 결합이 어떻게 보편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하는 철학적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서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간과된 것은 문화 간의 결합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실천적, 윤리적 의지의 측면이다. 후설 현상학은 자신의 본래적인 윤리적인 정신에 기반을 두고 상호문화성을 하나의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주제로 정립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본 글은 이러한 후설 현상학의 상호문화성 이해에 공감하면서 상호문화성을 후설 현상학의 방법론에 근거해 윤리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후설에서 상호문화성 해명의 출발은 그의 타자경험이론의 주축인 감정이입이론이다. 그런데 감정이입이 기본적으로 나를 넘어서서 타자에로 향하고 나아가 그를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실천적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한 하나의 윤리적 태도로 해석할 수 있다. 후설에서 상호문화성의 해명은 이러한 감정이입적인 타자경험에 기초해 이루어진다. 그런 한에서 윤리성을 전제로
타자의 문제를 자신의 철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레비나스는 타자를 절대화해 절대적 타자성의 실체와 근거에 대해 해명한다. 여기서 레비나스가 철학적 토대로 삼고 있는 것이 현상학이다. 레비나스는 현상학의 지향성 개념을 근거로 나와 타자의 관계를 밝힌다. 그러나 타자의 절대성에 대해 집착하는 레비나스는 절대적 타자의 개념을 현상학을 넘어서서 형이상학적으로 정초할 것을 시도한다. 그의 타자 형이상학의 핵심적 근거가 되는 개념은 바로 무한성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하나의 무한자로 설정한 후 이를 바탕으로 타자의 형이상학을 정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도는 본래 그가 출발점으로 삼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타자경험으로부터 괴리된 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무한 개념으로 침잠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체계의 부정합성을 드러내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레비나스가 타자의 철학을 직접성의 경험에 근거해 정립하고자 한다면 형이상학이 아닌 현상학적인 방향에서 이를 체계화했어야 옳다. 이런 맥락에서 타자경
제대로 주제화되지 않은 것이 인간의 ‘기분’이다. 이 기분은 20세기에 들어와 현상학, 특히 하이데거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조명이 되었다. 이 기분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이며 이 불안은 바로 ‘낯설음’을 특징짓는다. 본 글의 주제는 이 낯설음이 갖는 철학적, 현상학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낯설음은 하나의 기분으로서 일상적으로는 제대로 주제화되지 않는 세계의 존재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철학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드러난 세계의 세계성이 사실은 세계의 친숙한 지평성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세계의 주제화는 친숙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만이 아닌 친숙성을 어느 정도 보존하는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낯설음이 친숙한 일상성을 깨트림으로써 세계를 드러낸다고 할 때 이 낯설음은 친숙함을 전제로 하거나 최소한 그 자체 내에 이를 포괄하고 있어야 한다. 후설 현상학은 비록 이러한 문제의식에서는 아니지만 낯설음과 친숙함과의 상관성을 현상학적으로 잘 드러내고
상호문화성은 문화적 다양성(타자성)과 동질성(보편성)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양자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상호문화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러나 현재의 상호문화성과 관련된 논의에서는 대체로 문화적 다양성의 보존에만 관심이 쏠려 있고 문화적 동질성의 측면은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이제까지의 서구의 전통철학과 지성사가 지나치게 보편성과 동질성만을 강조한것에 대한 반발과 함께 동질화가 극단화될 경우 나타나는 획일화된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놓여있다. 그러나 문화적 다양성과 동질성은 서로대립적으로 보아야 할 요소가 아니며, 동질성의 추구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서 오히려 긍정적인 면을 지닌다. 공감과 놀이는 인간이 동질성을지향하면서도 동시에 타자성을 포용함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간의본성적 능력이자 활동이다. 문화적 동질성의 추구는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문화적 다양성 내지 타자성과 양립 가능하며 상호문화성을 형성하는
문】현대의 기술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기술에 의한 인간의 획일적 지배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기술의 노예가 된 채 기술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기를 강요받는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멀어진 채 소외된 상태로 살아간다. 이러한 인간소외를 초래하는 기술시대의 극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의 윤리학이 필요할 것인가? 전통적인 윤리학이 기반을 두고 있는 이성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나름대로 매우 합리적이고 주지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기술시대의 전반적 경향에 대항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기술시대에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은 인간의 감성이다. 그리고 기술시대의 윤리학은 여기에 호소해야만 하나의 설득력 있는 윤리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감성에 바탕을 두면서 동시에 기술시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인간의 능력은 사랑이다. 따라서 기술시대에 대한 하나의 효과적인 윤리적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의 윤리학이다.그러면 기술시대에 적합한 사랑의 윤리학의 모
근대 이후 전통적으로 자유는 자유의지 내지 주권과 동일시됨으로써 자유의 근거는 전적으로 주관 내부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법론을 통해 자유의 근거가 주체를 초월한 비주체적 요소에 있음이 제시됨으로써 이른바 비주권적 자유의 이념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전통을 이은 아렌트와 레비나스는 비주권적 자유의 다양한 측면들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렌트는 개방적인 정치적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하나의 세계적 현상으로서의 자유의 현상학적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나 아렌트는 자유의 비주권성을 결정적으로 근거짓는 타자의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비주권적 자유의 의미를 스스로 희석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자유와 타자의 관계 해명을 자신의 철학의 주된 과제로 삼은 레비나스는 자유의 근거가 수동적인 타자체험에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비주권적 자유의 의미를 보다 명료히 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감성적인 타자체험
전통적으로 숭고는 격정적인 체험을 통한 자아의 자기고양이라는 의 미에서 주로 주관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 숭고가 지니는 세계연관성 의 측면은 간과되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주관과 객관의 연관성 하에서 양자의 중간영역을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는 현상학은 전통철학에서 간과된 숭고성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간주된다. 현상학은 세계의 현 상을 주관적인 체험과 연관지어 설명하되 세계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현출하 는)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 현상학적으로 보았을 때 숭고는 이러한 세계의 드러 남의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수동적 체험이다. 그러므로 숭고는 현상학적으로 유 의미한 방법적 토대(현상학적인 에포케로서)임과 동시에 현상학적인 해명이 필 요한 하나의 현상이다. 하이데거에서는 이러한 숭고성이 불안을 통한 근본기분 속에서 표출이 된다. 메를로-퐁티에서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몸과 살의 원초적 존재영역 속에서 숭고의 계기가 포착이 된다. 양자 모두에게 숭고는 세계의
서구정신사에서 전통적으로 문화와 자연은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문화는 인간의 자연극복의 결과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가 자연적, 생물적 존재인 인간의 산물인 한, 문화와 자연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는 자연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인류학의 발달과 더불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화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문화해석에서 오히려 인간과 자연적 요소를 가능한 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문화결정론의 입장이다. 문화결정론은 극단적인 문화주의적인 관점에서 문화가 자연과는 무관하게 오직 자체의 내적 원리에 따라 발전해 간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연과 문화의 엄격한 구분과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면적이다. 현상학은, 문화는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양자의 중간영역이 존재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화결정론의 일면성을 교정할 적절한 실
후설 현상학에서 중심적 개념인 자율성은 개인적 자립이라는 의미보다는 보편적 태도를 지닌 주체의 속성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이 주체의 자율성의 실현을 위해 후설 현상학은 판단중지라는 현상학적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는 철저히 개인의 의지적 결단에 근거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의지적 결단이 개인적인 의지의 표현인 한 과연 이러한 판단중지를 통해 보편적 주체로서의 태도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 논란이 생긴다. 여기서 판단중지가 일종의 태도 변경인 한, 태도 변경의 특징을 지닌 상상력이 판단중지의 바탕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은 순수 가상을 향한 인간의 자유의 능력으로서 인간을 세속적, 현실적 관심으로부터 순수 보편적 태도 내지 관심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비록 후설은 판단중지와 상상력을 연관 지어 논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후설의 상상력 이해에서 이러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상상력과 자유를 연관시킨 사르트르와 상상력이 인간성의 질적인
후설 현상학은 하나의 정치철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본 논문은 전적으로 긍정적인 관점에서 논의를 펴나간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이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렌트의 정치철학이다. 아렌트는 정치의 자율성과 공공성 그리고 자족성에 초점을 두고 고대 폴리스 체제를 모범으로 자신의 정치철학적 논의를 펴나간다. 이러한 아렌트의 정치철학적 틀은 후설의 생활세계 이론에 적용할 경우 그 핵심적인 면에서 부합한다. 무엇보다도 생활세계의 경험주체로서 인격체(Person)의 자유는 아렌트의 정치적 행위자의 자유의 이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후설은 한편으로 이 인격체를 자신의 목적론적 틀 속에 정위시키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후설의 현상학과 아렌트의 정치철학과의 근본적 괴리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의 목적론적 체계는 그 방법론적 측면에서 아렌트의 정치철학의 일면성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자극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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