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진 교수
Sang-Jin Kang
서울대학교 철학과 · 인문학
연구실 소개
강상진 교수의 연구실은 기독교 철학과 고전 철학의 융합을 중심으로, 자연법, 도덕신학, 성체론적 사유, 그리고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 등 기독교 철학의 핵심 문제를 실천이성과 철학적 범주론을 통해 재해석합니다. 특히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보에티우스 등의 전통을 바탕으로 도덕성과 구원의 논리를 철학적 체계로 재구성하며, 실천이성과 사랑의 질서, 후행적 필연성 등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철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연구는 고전 철학의 개념을 기독교 신학적 맥락에 융합함으로써 현대적 도덕 철학과 신학적 사유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연구 현황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요 논문
15본 논문은 자연법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를 법률주의적 도덕신학의 틀 내에서 해석하는 전통에 반대하여 실천이성의 역할을 보다 강조하는 주지주의적 해석을 시도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주류를 형성한 의지로서의 법 이해와 이것에 근거한 도덕신학의 입장이 자연법과 실천이성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실천이성의 제일원리는 그로부터 자연법의 내용이 도출되는 원리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실천성 자체의 토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살인의 금지나 자녀의 양육, 무지로부터의 탈피와 같은 자연법의 구체적 내용은 인간 본성이 가진 여러 수준의 경향성을 질서 있게 인간의 완성이라는 목적으로 인도하는 데서 성립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자연법의 계명(praecepta)들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지시로서 인도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물려받은 실천이성의 목적적 인과의 개념을 이런 방식으로 법적 사유에도 적용함으로
서양 덕론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분기점을 만들어 준 작가로 아우구스티누스를 들 수 있다. 덕을 통해, 즉 인간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것에 따라 행복에 이른다는 고전적인 생각의 자리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라는 양극성에 근거한 모델을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적 지복과 동일시하는 참된 행복은 덕을 통한 인간의 성공적 삶에서 성립할 수 없다. 고전적 덕은 비이성적 감정들을 지배하는데 성공할 수 있지만, 비이성적 감정 자체가 이미 사랑의 방향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적 덕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습관화는 예기치 않았던 사랑의 관점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덕이 올바른 사랑의 질서에 놓이지 않는 한, 감정에 대한 지배력이나 인간 행복에 대한 기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덕론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무게 중심의 이동이 있다. 수단과 목적의 구조는 불변이지만 각각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되던 덕이 이제 사랑의 방향이 어느 쪽인가에서 성립하는 것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5권에서 논의되는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양립가능성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은기술적 영역에 속하는 사안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한 이 기술 논변이 구체적으로 어떤 통찰을전해주고 있는지, 또 이어지는 전체 논증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있는지 분석한다. 기술적 영역은 특정한 조건이 주어지면 기술의 투입을 통해 의도했던 효과가 발생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필연성에 대한 앎을 허락하지만, 이필연성이 인간적 판단과 의지라는 조건에 의존하는 만큼 반드시그런 결과가 나와야만 할 필연성은 없는 영역이다. 보에티우스는 이 모델을 토대로 미래 결과에 대한 앎은 성립하지만, 그 앎이 미래 사건이 자유롭지 않게 만드는 필연성을 부여하는 것은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기술 논변은 짧은 논증 속에서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벨라르두스의 의도 개념 해석을 둘러싼 쟁점 중의 하나는 의도 개념이 강 조하는 내면적 주관성과 도덕적 자연법의 절대성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해 소할 것인가이다. 단적으로 예수를 박해한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행 위가 신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굳게 믿어 행위한 경우와 같이 순수한 의도 로부터 나왔지만 잘못된 양심에서 비롯한 잘못된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것 인가의 문제이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아벨라르두스 의도개념의 층위를 분석 하고 이 분석으로부터 아벨라르두스의 입장을 주지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한 다. 의도는 자신이 지향하는 목적에 대한 통찰에 의해 자신의 자연적이고 일차적인 의지를 매개하는 성격을 갖는다. 예수를 박해한 유대인의 경우에는 의지의 일차적 방향을 매개할 지적인 계기가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 한 의도일 수 없다는 것이 아벨라르두스의 분석이다. 아벨라르두스의 ‘의도’ 개념은 의도 바깥에서 의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하는 질서 내지 섭리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범주』에 나타난 논의를 토대로 관계의 범주적 이해를 시도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두 가지 정의가 무엇이며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가 든 각종 예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관계 범주의 특징으로 제시한 ‘서로를 향해 얘기’하는 것이나 본성상 동시 존재, 인식론적 대칭성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면서 그의 통찰을 한국어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관계에 대한 범주적 이해의 요체가 무엇인지, 그것의 함축이 무엇인지 점검한다.
『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2권에서 안셀무스는 성육신을 통한 구원이 필연적이었다는 1권의 설명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룬다. 신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필연성에 의해 강제되어 인류를 구원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신이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을 위해 신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안셀무스는 대략 세 단계를 거쳐 이 문제들을 해명한다. 이 문제들에 대한 안셀무스의 대답을 이해하고 답변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이유가 줄지 않는다는 첫 번째 답변과 필연성 혹은 불가능성이 신의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두 번째 답변은 세 번째 답변의 중심개념인 후행적 필연성에 이르러 최종적 단계에 이른다. 신과 구원에 대해 얘기되는 모든 필연성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고 오직 성립하는 사태로부터 따라나올 뿐인 후행적 필연성일 뿐이다. 각 단계의 설명은 다음 단계의 설명을 전제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론』(De beata vita)의 이해에서 발생하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자비로운 신을 가지면서 신을 갖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이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이 논문은 다음의 두 가지를 보이려 한다. 1) 이 모순처럼 보이는 일은 근본적으로 추구와 소유 사이의 긴장에서 발생한다. 즉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중인 사람은 아직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원칙적 명제에서 기인한다. 2)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지혜와 최고의 척도라는 그리스도교적 틀 안에서 해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소유한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진리를 통해 최고의 척도에 도달하는 것으로 새긴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의 틀 안에서는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하는 것만을 배제할 뿐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지혜로 이해되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가지면서 동시에 최고의 척도로 이해된 하느님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아벨라르두스는 자신의 작품 『비교토론』을 통해 당대의 주도적인 세 가지 삶의 방식, 즉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자연법(철학)을제시한다. 이 논문은 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논증한다. (1) 비교토론의 모든 참가자는 자신들이 표방하는 삶의길이 이성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공통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2) 그들은 철학이나 종교적 가르침의 궁극 목표가 인간의 완성 혹은 행복으로 이해되는 최고선(summum bonum)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3) 유대교가 이성에 덜 부합하는 종교로 판명나는 반면, 그리스도교는 최고선의 해석에서 고전적 윤리학을 능가한다. (4) 이성성 자체가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인 방식으로 정의되었다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최종결론인 ‘순수한’ 의도는 건전한 지반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철학과 종교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12세기적 확신을 공유하는지, 혹은 철학이나 종교적 가르침들의 차이를 합리성의 관점에서 평가할 잣대로서의
12세기 파생어에 관한 한 이해는 파생어가 그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되는것(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아벨라르두스의 『<범주>편 주석』은소유(hexis, habitus)가 등장하는 세 개의 맥락, 즉 1) 질 범주의 첫 번째하위종으로서의 습성 2) 소유 범주 3) 소유와 결여 대립에서의 소유를 면밀히 분석하여 의미를 구별하면서 파생어/동본이형의 의미론적 계기들을 분석하고 이계기들이 어떻게 서술의 맥락에서 발현되는지를 설명한다. 파생어/동본이형은 형상과 기체, 그리고 양자가 소유의 방식으로 결합되면서 의미가 구성되는 바, 기체를 부르면서 그 기체와 관련하여 형상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의미하는 것이 파생어이다. “사람은 맹인(caecus)이라고 불리지, 맹목성(caecitas)이라고 불리는 일은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언은 아벨라르두스에 의해 파생어/동본이형의서술과 관련한 범형적 지위를 얻게 된다. 따라서 소유 범주, 소유-결여의 대립을 주석하면서 제공되는 소유에 관
형용사 의미론이 제기하는 중심문제 중의 하나는 형용사가 수식적 용법과 서술적 용법 각각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따라서 서로 다른 논리적 값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좋은 제화공이다'가 참이라면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소크라테스가 좋다'는 말을 안전하게 도출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소크라테스가 제화공으로서 좋다는 얘기를 할 뿐 단적으로 좋다라든가 인간으로서 좋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1079-1142)는자신의 작품 『철학자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대화』nn.141-146 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되는데, 동시에 어떤 종류의 신학적 통찰들이 자신의 분석 뒤에 숨어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그는 형용사의 서술적 용법을 정확히 문장의 주어를 수식하는 수식적 용법의 생략된 형태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저 제화공은 좋다"는 문장은 "저 제화공은 좋은 제화공이다"를 의미할 뿐이다. 동시에 그는 관련
아벨라르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편의 관계 범주(7장)을 주석하면서전통적으로 해석상의 난점을 제공하던 몇몇 문제에 대해 하나의 체계적이고 일관된해석을 제공한다. 이 해석을 소개하고 그것의 성취를 평가하는 것이 이 논문의목표이다. 관계 범주의 첫 번째 정의와 두 번째 정의 사이의 관계 문제나, 관계범주의 일종으로 제시된 자세(positio)와 태세(situs) 범주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헌학적 난제들도 이런 틀에서 일관되게 해명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포함하여 다른난제들도 이 틀에서 해결되고 있고, 무엇보다도 그의 유명론적 입장으로부터 관계자체와 관계항 사이의 선명한 개념적 구별, 관계 범주가 개체 차원과 종 차원에서구별되는 방식에 대한 해명을 제공할 수 있고, 이것들은 중요한 철학사적 성취로평가할 만하다는 것이 본 논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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