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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 교수

Suk-kyu Lee

한양대학교 사학과

연구실 소개

이석규 교수의 연구실은 조선시대 정치이념사, 특히 민본정치와 구언 제도의 기능 변화를 중심으로 연구한다. 특히 16세기 이후 민본이념이 제도적 실천에서 퇴색하고 군주의 도덕적 실천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분석하며, 재이, 응지상소, 언로의 기능 변화를 통해 지배층과 민간의 정치적 상호작용을 탐구한다. 이는 조선 후기 정치문화의 이면에 자리한 권력과 도덕, 사회적 저항의 구조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다.

민본정치응지상소구언 제도재이 이론군주 수성

연구 현황

논문 수
13
총 인용 수
66
최근 5년 논문
5
주요 분야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5개년 연도별 논문 게재 수
5총합
2011
2013
2015
2016
2019
5개년 연도별 피인용 수
29총합
20112013201520162019

주요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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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문|인용수 11·2013
조선 전기 三年喪制의 확립과 民의 성장
이석규

The practice of the three-years mourning was established during the regime of Sejong. The Confucian principle that the practice of the three-years mourning applies to all human beings from the emperor to the common people, however, could not work in the hierarchical society of the Choseon Dynasty. For a long time, it had been controversial to allow the practice of the three-years mourning to the military men and ordinary people. The issue became acute in the reign of Joongjong; the ruling class

2
논문|인용수 10·2007
연산군ㆍ중종대 求言의 성격 변화와 그 의미
이석규

조선 초기 성종대까지 주로 재이에 대한 대책으로 행해졌던 구언은 민본정치를 이루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언로를 확대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연산군과 중종대에 이르면 이같은 구언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다.연산군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를 ‘凌上之風’으로 규정하면서 점차 언론행위를 무력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구언도 왕권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재위 후반기에는 일체 구언을 하지 않았다. 反正의 성공으로 즉위한 중종은 막힌 언로를 회복하기 위해 재위 전반기에 자주 구언하였지만, 연산군의 폭정을 경험했던 신료들에게는 군주의 도덕적 실천=수성만이 天의 경고에 응답하는 실질[應天之實]이었다. 응지상소의 내용도 이전처럼 제도의 개혁이나 정비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보다는 군주의 수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같은 신료들의 요구가 중종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면서 구언은 허례로 인식되어 별로 행해지지 않았다. 단지 ‘草澤之士’로 표현된 재야의

3
논문|인용수 9·2011
16세기 조선의 민본이념과 民의 성장
이석규

조선 초기에는 민이 군주의 하늘이라는 인식에 근거한 민본이념이 강조되었다. 지배층과 민의 관계를 ‘相報的’ 관계 또는 ‘同胞’로 보기도 하고,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민도 유교적 도덕을 실천할 수 있는 ‘本然之性’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이로써 종래 현실정치에서 무시되던 민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정치적 실체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여전히 민은 도덕적 본성을 현실의 도덕 규범으로 전화시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였고, 이 점에서 지배층과 구분되는 존재였다. 이처럼 조선 초기는 명분론과 민본이념이 정치이념으로 작동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민본이념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이는 지배층의 민본정치를 담보하는 수단이었던 災異를 天이 군주에게 보내는 경고로 받아들임으로써 민생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들이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민본이념은 변질되었다. 민생과 직결된 한재나 여역과 같은 재이가 빈번하게 발생해도 재이를 천의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천의

4
논문|인용수 7·2007
조선 초기 應旨上疏를 통해 본 成宗代의 변화
이석규

응지상소의 내용별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두 702건에 달하는 상소의 내용을 개인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수성’과 제도상의 문제를 제기한 ‘제도’로 분류한 결과, 제도와 관련한 상소가 487건으로 전체의 70%에 육박하였다. 조선 초기가 새로운 국가의 지배체제를 안착시키기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해가던 시기였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487건의 제도 관련 상소를 다시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군사’ㆍ‘척불’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 결과 前三者가 각각 25~28%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後二者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정치’와 관련한 139건의 상소 가운데 109건은 규례를 마련하려는 것이고, 이중 절반이 넘는 56건이 ‘인사’에 대한 것이었다. 정치제도와 관련해서는 인사 규례의 정비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제’와 관련한 상소는 122건이었다. 이 가운데 절반인 61건이 ‘공물’에 대한 것이고, ‘전세’와 ‘역역’은 각각 13건과 12

5
논문|인용수 6·2009
조선 明宗代의 求言과 民本理念의 변질
이석규

본 논문은 조선 명종대에 행해진 구언 제도를 통해 이 시기에 민본이념이 변질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명종대에는 한재와 여역이 극심하였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언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왕의 안위와 관련된 재이가 발생하였을 때 구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재이가 더이상 군주의 민본정치를 강제하는 수단이 되지 못할 정도로 당시의 지배층은 민생의 안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민생에 대한 외면은 진휼정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집권 훈척세력은 진휼의 책임을 수령에게 맡기자는 입장이었지만, 진휼에 소홀한 수령을 적간하는 것에는 적극 반대하였다. 민이 굶주리는 것은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라거나 또는 민이 게으른 탓이라고 하면서 수령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수령과 구조적으로 결탁된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사림계 관료들에게도 민본정치는 적극적인 관심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원론적이고 추상적 덕목인 군주의 ‘正心’만을 강조할 뿐, 그것이 어떻게 현실 정치에서 구체화되

6
논문|인용수 6·2006
朝鮮初期 應旨上疏에 나타난 制度論
이석규
7
논문|인용수 5·2002
조선초기의 응지상소자
이석규
8
논문|인용수 4·2019
조선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2017~2018)
이석규

첫째, 연구 성과물은 비약적으로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연구자는 꾸준히 감소하는 현상에 대한 우려이다. 연구 성과물의 증가가 전문 연구자의 수와 무관한 현상이라면, 이는 정상적인 상황이라 할 수 없다. 둘째, 연구사 정리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연구사 정리는 자신의 연구가 갖는 의미를 부각하는 기제인데, 이에 소홀하다면 자신의 연구 의미를 스스로 축소하는 것일 뿐이다. 셋째, 지방(또는 지역)이라든가 향촌의 문제를 다루면서 중앙(정부)와의 관련성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빅데이터 분석 기법을 활용한 연구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다섯째, 거대 담론의 부재를 또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론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여섯째, 새로운 시각, 보다 넓은 시야에서 조선시대사를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역사가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9
논문|인용수 3·2015
동강 김우옹의 군주 중심의 경세론
이석규

본 논문은 동강 김우옹의 군주 중심의 경세론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김우옹은 사림정치가 시작되는 선조대의 정치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를 민생의 안정을 위한 기강의 확립으로 보았다. 김우옹에게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군주였다. 왜냐하면 군주는 天道의 실현자로서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지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시 군주에게 聖學을 요구하면서 賢臣의 역할을 강조하던 분위기에서 볼 때, 그의 군주 중심의 경세론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예컨대 이황이나 이이는 ‘군주의 표준’을 의미하는 『書經』의 ‘皇極’을 군주에게 수신을 요구하는 근거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김우옹은 오히려 황극을 동인과 서인을 초월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군주의 표준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숙종대 朴世采가 주장한 군주 중심의 皇極蕩平論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군주의 존재와 역할을 강조한 만큼 김우옹에게 제왕학으로서의 聖學은 매우 중요하였다. 그는 오직 敬을 통해 민을 위한 왕도정치를 행해야 한다는 군주성학

10
논문|인용수 3·2002
조선초기 왕세자 교육에 나타난 인성교육
이석규

본 연구에서는 민주시민의 육성이라는 사회과 교육의 목표가 그 토대에서는 ‘인성교육’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조선초기 왕세자 교육에 나타난 인성교육의 실체를 살펴보았다. 이로써 비이성적반윤리적 사회현상이 심화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사회과 교육의 인성교육에 하나의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왕세자의 인성교육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시되었다. 하나는 교육의 담당자를 선발하는 문제였는 바, ‘학문이 뛰어나고 덕이 깊은 단정한 사람’을 신중하게 선정하여 이들에게 특별 대우를 함으로써 안정적이고 소신있는 교육이 가능토록 하였다. 다른 하나는 인성교육의 내용으로서, 이에 대해서는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이 강조되었다. 아울러 교재로는 유교의 경전과 역사서가 주로 이용되었고, 교육 방식은 일방적인 강의보다 토론과 실천이 중시되었다.

11
논문|인용수 2·2016
동강 김우옹의 민본사상
이석규
동아시아문화연구

본 논문은 동강 김우옹의 민본사상을 살펴본 것이다. 그는 유교 정치사상에서 명분론과 민본론이 절대적 가치임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양자는 현실 정치에서 항상 충돌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김우옹은 양자의 충돌 가능성을 군민일체론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였다. 즉 군주와 민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의제화하고, 부모와 자식이 일체인 것처럼 군주와 민도 일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서는 민에 대한 일방적인 지배나 또는 군주에 대한 반역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자는 일체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군민일체론은 16세기 조선의 정치사상사에서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김우옹이 활동했던 시대는 지배의 명분만이 강조되면서 민본정치는 실종된 상황이었다. 이에 그는 민본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사공과 변통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민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민에게 피해를 주는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변통해야 할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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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인용수 0·2010
樗軒 李石亨의 생애와 경세사상
이석규

이석형은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관학파 유학자였다. 관료 생활의 절반 가까이를 집현전에서 근무하면서 『치평요람』․『역대병요』․『고려사』 등의 역사서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는 세조의 집권에 참여한 훈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에 반대하여 절개를 지키지도 못하였다. 대신에 그는 훈신뿐만 아니라 사림계 인물과도 친분을 가졌다. 이석형은 강렬한 경세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경세의식에 나타나는 특징은 첫째, 조선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조선의 문물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지녔다는 점이다. 둘째, 이같은 자부심을 바탕으로 역사로부터 治道를 얻으려 했다는 특징도 지닌다. 이같은 경세의식의 총결산이 『대학연의집략』의 편찬이었다. 당시 경세서의 편찬을 주도했던 것은 왕권이었지만, 이 私撰 경세서의 편찬을 계기로 『대학연의』의 활용 주도권이 국왕에서 점차 신료들에게 넘어갔다고 생각된다. 역사에서 치도를 얻으려 했던 그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았던 것은 ‘强者가 스스로를 억제하고 怯者가

13
논문|인용수 0·2005
『조선전사』중세편의 ‘민’ 인식
이석규

조선전사 중세편에서 인민대중은 봉건지배계급의 착취로부터 자주성을 획득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외세로부터 국가의 자주성을 지켜내는 반침략투쟁의 주체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전제가 상호 모순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조선전사는 서술을 간략히 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방식으로 피해가면서 오히려 인민대중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떠나 항상 반침략투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반침략투쟁을 계급투쟁보다 상위의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반침략투쟁은 국가의 자주성을 확보한다는 단일한 목표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투쟁마다 자주성의 내용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단순한 계급투쟁이 반침략투쟁으로 전환되었고, 삼별초의 항전을 계기로 반봉건반침략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 투쟁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같은 투쟁의 발전과정이 곧 깊이와 폭을 더한 인민들의 자주성의 내용이었음을 말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후의 투쟁이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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