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곤 교수
Sung-geon Shin
한양대학교 사학과
연구실 소개
신성곤 교수의 연구실은 동아시아사의 핵심 주제인 인구 이동, 제도사, 종묘 제도, 역사적 통계의 신뢰성 등에 초점을 맞추며, 기후 변화와 정치·경제적 요인이 인구 이동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합니다. 특히 기후 변화와 연관된 인구 이주, 전통적 통계자료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간이적 기록자료를 통해 노비의 사회적 지위와 가족 내 성격을 고찰하는 데도 기여합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다층적으로 재구성하고, 교육과정 개편과 연계된 실용적 역사학의 정착을 목표로 합니다.
연구 현황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요 논문
14关于魏晋南北朝时期的人口移动和地域分布情况进行了概括的研究以后,发现了几个值得思考的一些问题。以前对人口移动原因的研究,大概是以永嘉之乱为起始,在注重包括五胡等的北方民族迁入内地的同时,一般多是强调这一时期的政治的混乱和战争、接连不断的自然灾害和遭受严重破坏的农业生产,以及近于掠夺性质的各族政权过重的赋役等。 但是在研究这个时期人口移动的时候,还要充分考虑并进一步深入探讨以下几个方面的问题。首先要重视的是在这一时期由于生态学的特性,即受气候变化的影响,北方民族大规模内迁以及由此引发的汉族南迁现象。其次,以这种观点为基础,人口移动的起始时间也应该从以往的永嘉之乱上溯到更早的后汉。这一点是不容忽视的。 第三,与汉族建立的王朝不同,北方民族建立的十六国政权下进行的频繁的迁都和随之而来的大规模人口迁移,也是给人口移动带来重要影响的政治性要素。这也是要考虑的。第四,魏晋南北朝的各个政权,特别是十六国和北朝政权在战争以后实施的大规模迁徙政策也是引起人口移动的重要原因。这也是不可疏漏的。 考察这一时期人口移动的方向和分布,就会发现早在后汉时期北方民族就已经大规模迁入陕西和山西等的内地,而许多汉族和其
왕실의 조상신을 받드는 공간인 종묘의 기원이 商周에 있었는지, 西周에서 완비된 이상적 제도로 존재했는지 현재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西周라는 도시국가 형태의 왕실 조상제사를 모시던 종묘와 秦漢처럼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던 제국의 황실 조상제사를 모시던 종묘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춘추 말, 전국시대부터 왕릉 주변에 陵園을 조성하고 寢殿과 宗廟를 두어 조상 제사를 받들던 형태, 즉 陵旁立廟에서 벗어나 전한 초부터 점차 수도와 郡國에 다양한 형태의 종묘가 두어졌다. 이후 유교가 국교화 되면서 이러한 형태의 종묘가 점차 단일한 공간으로 통합하고, 선황들의 神主를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배치하고 迭毁하는 제도로 발전하였다. 원제 때부터 西周의 종묘를 따르자는 유학자 관료의 주장에 따라 시작된 종묘 개혁은 애제와 평제를 거쳐 마침내 외형적으로나마 ‘天子七廟’가 확정되었다. 비록 王莽의 ‘天子九廟’가 있었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후한 내내 형식상의 ‘天子七廟’는 유지되었다. 특히 후
10세기 이전 동아시아에서 대규모로 인구가 이동하는 되는 계기는 정치적․경제적 요인 등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연평균 기온의 변화였다. 기상학자와 기후학자, 식물학자, 지질학자 등의 학제간 연구에 의하여 동아시아에서는 대략 지금부터 5000년 동안 4차례의 온난기와 4차례의 한냉기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온난기에는 정착 농경민인 한족 세력이 서쪽, 북쪽, 남쪽을 향해 표출되어, 군사적 정복과 이주 정책을 통해 인구가 이동하였다. 반대로 한냉기 혹은 온난기에서 한냉기로 변화할 때에는 북방의 유목민이 대거 남하하여 정착 농경민을 정복하고, 남하해온 지역에서 각기 이주정권을 세우고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이들 이주정권들은 자신들의 남하로 일어난 인구 이동 외에도, 정복한 정착민과 복속시킨 유목민을 특정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취하여, 이동해간 지역 내에서의 인구 이동을 한층 강화시켰다. 또한 이들 이주정권들은 토착정권에 비해 영토나 토지에 대한 애착보다 호구에 대한 애착이
필자가 2013년도에 실시한 <동아시아사> 설문조사의 결과, 역사교사들은 각 단원별로 시대적 개관이 필요하며, 병렬식 내용서술을 지양하고, 일부 어려운 주제는 삭제하여 내용을 감축하기를 원했다. 학생들 역시 학습내용을 감축하여 암기 부담을 줄이고,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서술해 주기를 원했다. 2011년 개정 <동아시아사> 교육과정은 기존의 내용요소를 삭제하거나 합침으로써, 3개의 내용요소를 줄였다. 하지만 그 결과 새로 만들어진 내용요소가 기존의 연구 성과와 잘 맞지 않거나 심지어 비역사적이라는 새로운 문제점이 나타났다. 개정 교육과정은 또 통사적 흐름을 강조하고, 중단원을 분야사로 구성함에 따라, 분야사 위주의 통사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필자는 <동아시아사>가 주제사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학습내용을 감축해야만 현재 논의 중인 교과목 개편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2011년 개정 교육과정을 토대로 하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부분은 2007년/2009
본고는 최근 출토된 진한시대의 簡牘에 나타난 노비의 모습을 추적해 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자료는 『里耶秦簡』의 호적류 簡牘과 『張家山漢簡』의 <二年律令> 및 <奏讞書>이다. 이런 簡牘자료에 나타난 관노비의 민간 매각 과정을 검토하여 이것이 사노비 발생의 주요 원인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券書의 성격을 검토하여 노비를 매매하는 절차에서 매매가 합법적 효력을 가지기 위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였다. 다음으로 주인이 노비를 가부장적 가족질서 내에 두기 위해 자신의 호적에 노비를 등재시키는 방식을 秦代와 漢代의 호적류 簡牘을 통해 세밀히 분석하였다. 그 결과 노비가 주인의 재산으로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가부장의 권한이 미치는 ‘家’의 구성원으로서 ‘家人’으로서의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주인은 노비에게 마치 부친이 자식에게 ‘孝’를 강요하듯이 가족윤리를 강제하고 있었고 국가는 법률적으로 이것을 보장해주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주인에 대한 예속도가
三國시대는 戶口數가 後漢의 전성기에 비해 15% 정도로 격감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 戶口가 줄어들었다기 보다 國家가 編戶化한 戶口가 대폭 감소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엄청난 호구수의 격감 현상은 전란과 재해, 살육과 수탈로 대변되는 척도로 활용되어 왔다. 게다가 최근에는 민족융합과 역사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중국학계의 경향을 보여주듯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성과에 이러한 수치가 아무런 비판없이 인용되기에 이르렀다. 本稿에서는 삼국시대의 호구수에 대한 각종 통계자료를 활용하여 이 시기에 호구수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고 그 추이는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러한 통계수치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後漢에서 西晉 太康 初年에 이르기까지 蜀漢, 孫吳, 曹魏가 각각 통치하던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시기를 나누어 면밀히 분석해 보았다. 그결과 몇가지 의미있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첫째 삼국시대의 戶口數는 수치상 後漢보다 15% 정도 격감하였지만 지역적으로 큰 편차를 보이지는 않았다.
宇文護는 北周 明帝를 독살한 뒤 武帝가 즉위한 560년 4월 이후에도 여전히 大총宰, 都督中外諸軍事, 五府總於天官을 겸임하여 軍政의 대권을 장악하고 覇府를 중심으로 宇文氏政權을 공고히 유지하였다. 武帝 宇文邕은 그의 권세를 인정하고 공순함을 드러내며 최대한 실각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실제 長安에 두어진 王都는 유명무실하였다. 그러나 覇府를 장악한 宇文護는 전쟁을 통해 覇府의 권한과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 王琳사건에 개입하여 561년 1월까지 남조 진과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를 당한 채 철수하였다. 그러자 武帝는 561년에 御正 殷不害와 司會上士 杜고를 파견하여 교섭을 벌인 끝에 西魏 시절 江陵 점령 때 포로가 되었던 陳覇先의 동생 陳頊을 송환하여 562년에 진과 정식으로 우호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覇府 주도의 전쟁이 좌절되고 王都가 외교적 교섭을 통해 국가간의 우호를 추진함으로써 수습하는 형세가 된 것이다. 宇文護는 이에 그치지 않고 563년부터 564년초까지 다시 突厥과
7~8세기 동아시아에서는 都城의 시대가 열려 각국이 수당 장안성을 본딴 격자형 도성의 건설에 나섰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장안은 동아시아의 도성 표상이랄 수 있고, 그 안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모습은 당시를 잘 반영해주는 일상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글은 장안 거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들렀을 시장의 모습을 일상생활의 표상으로 구성해 보고자 하였다. 장안의 거주민들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110坊에 넣어져 정부에 의해 공간과 시간을 통제받고 있었다. 어떤 학자는 이를 ‘감옥도시’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이들의 일상의 자유는 일출과 일몰까지 방 밖을 나갈 수 있는 시간, 그리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제한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장의 출입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이글에서는 먼저 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공간적 배치와 시서를 통한 각종 통제를 통해 국가가 어떻게 주민들을 통제하고, 시장을 관리하려고 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시장 통제를 담당하는 市署의 역할을 상세히 분석함으
六朝시대에 등장한 자연촌락으로서의 村의 기원을 기존 문헌자료만이 아니라 최근 長沙 走馬樓에서 출토된 吳簡에 대한 연구 분야 중 ‘丘’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그 성격을 분명히 하고, 村과의 유사성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그 결과 丘는 규모가 里와 비슷하거나 약간 컸을 가능성이 있지만 鄕보다는 작은 자연취락이었고, 도시에서 떨어진 田野 특히 丘陵지대에 두어진 농경지를 포함한 民戶의 거주지이기도 하였다. 丘는 村은 이처럼 규모, 田地와 거주지가 포함된 기능, 자연촌락적 성격에서 매우 유사하다. 다만 村의 분포는 거의 전국적이지만 丘는 현재까지는 孫吳 통치시기 長沙郡 臨湘縣 부근에서만 발견된다. 丘는 방어설비를 갖추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村은 자위적인 방어기능이 포함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었던 것 같다. 丘는 또한 聚 또는 塢壁과 비슷하지만 군사적인 방어적 성격의 강약이나 규모면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塢壁도 분포가 지역적 한계가 있었던 반해 村은 전국적인 분포를
When we consider history studies of Six Dynasties(六朝) in Korea during the last twenty years(1995 to 2015), we can easily find out four remarkable research trends, (1) an increasing of interdisciplinary researches, (2) growing interest in Korea-China relation history, (3) an increasing number of researcher and published thesis and (4) downswing of socio-economic history and improving of cultural history. This new trends certainly reflect in a sense practical research conditions, especially ideolo
综观556年10月西魏的实权人物宇文泰死后, 宇文护执政的四年期间西魏、 北周的政治就会发现, 宇文护把宇文泰的遗志, 即让宇文觉继承皇位, 自己总揽军国大权的顾命。 宇文护有必要像宇文泰执政时期那样, 承认六官制为中心的分权制结构, 保持王都和霸府分离的二元体制。 因为试图破坏这种局面的任何举措都是背弃宇文泰的遺志的, 掌管军政的宇文护觉得应该防范于未然, 而能够防范未然的机构就是霸府。 宇文护为了继承遗志, 全面进行魏周革命。 他以谋反为名肆无忌惮地杀害赵贵和独孤信、 废除孝闵帝、 毒杀明帝。 因为他有秉承遗志的名分, 所以他的行动就有其正当合理的一面。 上述事件发生之后, 从群臣之间没有异议的情况来看, 当时的朝政和军府对宇文护的这种解释和主张是大体接受的, 或者在某种程度上是予以首肯的。 557年2月以谋反事件为契机除去赵贵和独孤信, 是废除北镇武将内部根据年辈排序的“等夷”关系, 从而维护宇文氏政权连续性的根本措施。 孝闵帝废位的原因, 在于宇文氏姻戚集团和功臣子弟的跋扈, 以及非北镇武将出身的关陇出身功臣子弟的违抗遗志上, 而最终负责的则是皇帝。 同时, 在“关中本位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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