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조성산 교수

Sungsan Jo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 사회과학

연구실 소개

조성산 교수의 연구실은 조선 후기 주자학의 지적·정치적 전환을 중심으로, 세도(Seowon)의 교육적 기능과 그 붕괴, 주자학 지식인들의 천(天) 인식, 군현제·봉건제 논의, 사천학의 형성, 종교적 성향의 확산, 그리고 역사서술의 이론적 기반 등 다양한 사유적·철학적 전개를 다룹니다. 특히 유교 철학의 근본 개념인 '이(理)', '천(天)', '기(氣)', '복선화음' 등에 대한 재고를 통해 조선 후기 사상사의 내적 갈등과 변화를 분석합니다. 이는 조선 사회의 가치체계가 어떻게 유교적 이념과 실천, 그리고 외부 영향에 의해 재편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주자학천 인식복선화음사천학역외춘추

연구 현황

논문 수
46
총 인용 수
104
최근 5년 논문
7
주요 분야
사회과학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5개년 연도별 논문 게재 수
7총합
2022
2023
2024
2025
2026
5개년 연도별 피인용 수
5총합
20222023202420252026

주요 논문

15
1
논문|인용수 18·2013
18세기 후반 石室書院과 지식·지식인의 재생산
조성산

Seowon was not merely intended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 but also intended for nurturing the idealistic intellectual supported by Sarim faction. A new intelligence movement led by Seow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period suddenly changed to trend that Seowon became an exclusive part of a clan, which happened to fail to function properly. That is the reason why Seowon's education gradually ran toward decay.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was to disclose what kind of knowledge was used and deve

2
논문|인용수 10·2020
18세기 중후반∼19세기 조선 주자학 지식인들의 천(天) 인식과 서학(西學) 대응
조성산

본 글은 18세기 중후반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 조선 주자학 지식인들이 가졌던 天 인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당시 사회적 변화 및 서학의 도래 등으로 조선 사회는 주자학적 가치체계를 재정비하고 발전시켜야 하였다. 조선의 주자학 지식인들은 天과 理의 관계성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天과 理와 같은 궁극적인 가치체계들이 조선 사회에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특히 西學의 도래는 天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嶺南南人 지식인들과 老論 湖論系 지식인들은 天을 理로 인식하였다. 이때 理는 당위적이고 규범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며, 이후 그들은 보수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성을 가졌다. 그들의 이론 속에서는 서학이 인정될 여지가 부족하였다. 老論 洛論系 지식인들은 天을 氣와 理의 결합으로 보았다. 이를 통하여 天을 이루는 氣의 존재를 인정하였고, 서학 비판도 이를 전제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이론 속에서는 서학이 氣의 영역으로 인정될 수 있는 여

4
논문|인용수 8·2017
18~19세기 조선 봉건·군현제 논의의 역사적 전개
조성산

본 글은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郡縣·封建制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가졌던 국가 사회적 맥락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조선의 兩班制가 가졌던 국가 사회적 성격을 군현·봉건제의 틀 속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를 찾고자 하였다. 양반은 획득신분과 세습신분의 결합이라는 성격이 강하였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군현제의 능력주의적 성격과 봉건제적 세습의 성격을 동시에 가졌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은 지위의 세습이 아닌 이른바 능력주의를 강조한 柳宗元의 군현제 논의에 주목하였다. 노론계 金昌協과 金昌翕은 유종원의 논의를 수용하면서 賢人의 공정한 관직참여를 주장하였다. 근기남인과 소론계는 더욱 적극적이었다. 吳光運, 丁若銓, 柳壽垣은 군현제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군현제 능력주의의 건강한 복원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 양반제도가 가졌던 세습신분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군현제의 능력주의 주장은 18세기 탕평정국의 군

5
논문|인용수 7·2014
16~17세기 北人 學風의 변화와 事天學으로의 전환
조성산

본 글은 17세기 近畿南人 학풍 속에서 발견되는 事天學이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발생하였는가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16세기 北人 학풍을 살펴보고, 북인의 가문과 학맥을 전승하였던 17세기 근기남인들이 가졌던 학풍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天에 대한 관점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16세기 북인 학풍은 天道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파악하였고, 심지어 이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17세기 근기남인의 事天學은 天이 超越的 神格을 갖추었다고 여겼다. 이렇게 북인 계열 지식인들의 학풍이 변화하게 된 이유에는 두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첫째는 仁祖反正으로 인한 북인의 정치적 몰락이었다. 북인의 정치적 몰락은 그 후예인 근기남인 許穆과 尹鑴로 하여금 새로운 학풍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둘째, 새로운 학풍의 모색과정에서 明나라에서 형성된 종교적 심성을 강조하는 古學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 가지를 통하여 17세기 근기남인의 사천학은 만들어졌다. 이것은 명나라 고학으로부

6
논문|인용수 7·2017
19세기 조선의 福善禍淫 논의와 沈大允의 『福利全書』
조성산

19세기 들어서 조선의 주자학 질서는 점차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 균열들 가운데 종교적 심성의 출현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주자학의 중심개념이었던 자연적 원리의 理보다 종교적인 神道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던 이 경향은 조선후기 주자학 질서의 균열이 가졌던 특성들을 잘 보여주었다. 본 글은 이 종교적 경향의 이념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본 글은 福善禍淫 담론 속에서 진행된 善書의 활발한 출판과 조선의 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던 복선화음 담론의 논리를 찾고자 하였다. 선서와 복선화음 논의는 유학 이념과 함께 진행되었고, 沈大允의 『福利全書』는 이러한 유학의 경향을 대표하였다. 『복리전서』는 이기론을 통하여 복선화음의 원리를 규명하였고, 사후세계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복리전서』가 기존 유학이념과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복선화음 중심의 종교적 성향을 절충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 글은 19세기 동안 진행된 조선 유학의 종교

7
논문|인용수 6·2016
洪大容의 理氣心性論과 域外春秋 논의
조성산

본 글은 홍대용의 域外春秋 논의가 가졌던 사상적 기반에 대해서살펴보고, 이 역외춘추 논의가 가졌던 역사적인 의미들을 찾고자 하였다. 홍대용은 그의 理氣心性論을 통하여 모든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理를 강조하였다. 그 理는 존재법칙인 동시에 도덕윤리의 법칙이었다. 이것은 그의 역외춘추 논의에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었다. 亂臣 賊子를 논하는 『春秋』가 서술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君臣 관계를 갖는 국가가 먼저 존재해야 했다. 홍대용은 국가의 구성요건을 간단하게 함으로써, 夷狄은 국가를 구성할 만한 도덕적 능력이 부재하다는 논의를 극복했다. 이것을 그의 이기심성론으로 전환하여 설명하면 그가 제시한 국가의 구성요건은 국가구성의 理이며, 이것은 곧 국가의 도덕법칙을 의미하였다. 홍대용은 중화와 이적 모두 균등하국가를 구성할 수 있는 이러한 理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역외춘추 논의가 가능할 수 있었다. 이 역외춘추 논의는특정 국가의 배타적인 역사서술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9
논문|인용수 5·2014
申欽의 학문형성과 古學의 영향
조성산

본 글은 申欽의 秦漢古文, 邵雍 象數學, 心學이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었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본 글은 이 세 논의 속에 담겨 있는 공통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찾고자 한다. 신흠은 명나라 학술계에서 형성된 古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明나라의 지식인들은 고대 중국의 학술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신흠 또한 여기에 영향을 받아서 진한고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신흠의 소옹 상수학 연구도 고대 사회를 이상사회로 보는 고학 연구 경향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졌다. 이러한 신흠의 고학 연구 경향은 심학을 통하여 더욱 발전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의 고학이 단순히 ‘옛날 것’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움의 추구’라는 의미를 갖는데 심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 글은 신흠의 진한고문에 대한 관심, 소옹 상수학 연구, 심학의 주장을 그가 많은 영향을 받았던 명대 학술의 고학 경향과 관련하여 살펴봄으로써 신흠 학문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10
논문|인용수 3·2017
李鈺의 觀物論的 사유와 花潭學
조성산

본 글은 이옥(李鈺, 1760∼1814)과 소옹(邵雍, 1011~1077)․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사상을 비교해봄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많은 공통점을 가졌는가를 조명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소옹과 서경덕의 사유가 이옥과 같은 소북(小北) 가계의 지식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소옹과 서경덕은 기(氣) 밖에서 따로 궁극적인 원리를 찾을 수 없으며, 오직 기를 통해서만 궁극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유는 관물(觀物)이라는 용어로 정의되었다. 이옥에게서도 이 관물론적인 사유가 발견되었다. 이옥이 기의 현상인 정(情)에 관심 가졌던 것은 이것이 궁극적인 원리를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었다. 이옥은 관물을 위하여 관인(觀人)→관정(觀情)→관남녀지정(觀男女之情)→관녀(觀女)→관열녀(觀烈女)로 논의를 심화시켜갔다. 이옥은 같은 이유로 현실과 밀착된 언어인 향어(鄕語)와 속어(俗語)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옥에게 향어와

11
논문|인용수 3·2013
조선후기 성호학의 ‘지역성’ 담론
조성산

성호학의 東國 인식 속에는 동국에서 태어나 동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동국의 지식정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여기에는 중국이라는 중심성에 대조되는 ‘주변성’의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동국에서 ‘중화’의 의미들을 찾고자 하였다. 이는 첫째 ‘箕子의 유풍’과 둘째 ‘중국과의 근거리’라는 것으로부터 얻어졌다. 지역적으로는 주변이었지만 고대부터 성인의 교화권에 포함되어 있었던 동국은 중화의 유풍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동국에 주목하였던 이유였다. 그리고 성호학은 동국의 독자성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동국 인식 속에는 지리에 대한 논의들이 중요한 논거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성호학파의 동국 지식의 강조에는 동국 지식에 소홀했던 이들에 대한 비판의식 또한 내재해 있었다. 이는 집권층 노론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성호학파의 동국인식을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남과 서북지역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익은 영남지역에 대해서 많

12
논문|인용수 3·2015
The Yeonam Group’s Anthologies of Korean Literature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and Adherence to the Chinese Civilization in the Mid-18th and Early 19th Centuries
조성산
Korea Journal

This paper examines how the Yeonam group, led by Bak Ji-won (1737–1805), collected and compiled Korean literature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during the mid-18th and early 19th centuries. The Yeonam group attempted to prove how well Korean intellectuals had adopted and developed Chinese culture. Korean history, culture, and literature rapidly garnered the attention of Silhak (Practical Learning) intellectuals during this era. Previous studies, which tend to reflect the perspective of modern nat

13
논문|인용수 3·2024
朴知誡 耳目口鼻有心 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그 정치사회적 의미
조성산

인류의 역사에서 몸에 대한 이해는 정치사회질서를 시사하는 유비가 되기도 하였고, 역으로 정치사회질서의 변화는 몸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몸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중요하다. 본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17세기 朴知誡의 耳目口鼻에도 心이 존재한다는 耳目口鼻有心說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그것이 어떠한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목구비유심 논의를 통하여 박지계는 이목구비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인 자각 능력을 가졌음을 말하고자 하였고, 이것은 그의 주체적인 臣民 의식과 관련성을 가졌다. 이어 이 논의는 18세기 낙론 학맥에서 그 유사한 점이 발견되었고, 19세기 중후반 壬戌民亂을 전후한 시기 趙秉悳에 의하여 다시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다. 17세기 戰後 복구과정과 19세기 중후반 일반 백성들의 사회적 활동이 비등하던 시기 이목구비유심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이 논의를 둘러싼 역사성을 말해준다. 19세기 중

15
논문|인용수 2·2014
18세기 후반 李喜經·朴齊家의 북학사상 논리와 古學
조성산

본 글은 연암그룹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북학론을 전개하였던 박제가, 이희경을 통하여 북학논의와 고학인식의 상관성 문제를 검토하고자 하였다. 청나라로부터 중화문물을 수용하고자 하는 북학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중화의 원형질을 찾고자 하는 순수 지향의 고학의 문제의식은 억제되거나 회피되어야 했다. 본 글에서 정의하였듯이 고학의 문제의식은 古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순수한 중화의 원형을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며, 이러한 사유가 강할 경우 청나라 문물제도를 수용해야 하는 북학의 주장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북학의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중화의 순수성을 찾기보다는 중화의 계승성이 강조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희경, 박제가에게 고학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해소되고 정리되었는가. 그들도 여느 儒者들처럼 고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논리 속에서 은연중에 해소되어야 했다. 이희경은 성인 제도의 절대성을 강조하였다. 기예는 점차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대표 연구 분야

Sociology and Political ScienceCultural StudiesVisual Arts and Performing ArtsMarketingOcean EngineeringPhilosophy

조성산 교수의 연구를 Nubint에서 더 깊이 살펴보세요

이 연구실의 논문을 앱에서 열어 AI와 함께 읽고, 핵심을 요약하고, 내 글에 인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