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수 교수
Sungsoo Lee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공학
연구실 소개
이 교수의 연구실은 역사지리학을 핵심으로 하여, 고대사의 공간적 유산과 역사적 인식의 형성 과정을 기록과 문학, 사행 문헌을 통해 다각도로 탐구합니다. 특히 조선 사신의 행로, 북방 공간의 인식, 전통 서사와 역사 인식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며, 역사적 공간이 어떻게 정치·문화적 의미를 지닌 채 기억되고 재구성되는지를 분석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재구성을 넘어, 역사 인식의 형성 메커니즘을 밝히는 학문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연구 현황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요 논문
15燕行路 상에 있는 봉황산의 동쪽 자락에는 아직까지 고구려의 옛 성이 남아있다. 이 성은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벽의 둘레는 7,525m에 달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고구려의 烏骨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성이 745년 양만춘 장군이 唐의 대군을 물리친 安市城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 사신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 안시성설은 18세기 이후 사회의 통설이 되었다. 물론 역사지리학의 토대 위에서 이 안시성설을 부정하는 반론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렇게 특정 시점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의 공간에 깊은 역사적 유서가 깃들게 된 현상을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4세기 중엽에서 18세기 말에 이르는 시기 여러 가지 역사 조건을 고려한 결과, 이러한 현상에는 ① 唐太宗이 봉황산성에서 위기에 빠졌다는 薛仁貴 영웅담의 내용, ② 안시성주 양만춘이 唐軍의 파상 공격을 격퇴했다는 唐書演義의 내용, ③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략하지
遼東半島는 정치적 영유권과 상관없이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 공간으로서 존속해온 곳이다. 이 글은 한국의 역사 공간으로서 요동반도를 조명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고려말 對明 외교 속에서 형성된 使行路 중 요동반도상의 경로를 재구하고, 나아가 사행 현장에서 지어진 문학작품을 검토하여 이 공간이 지니는 역사·문화적 의미를 탐색한 것이다. 1368년 명나라가 남경에 도읍한 이래 1392년 고려가 망하기 까지 30여 년간, 고려에서 명나라에 파견한 사행의 횟수는 50차례에 이르는데, 그 대부분이 遼東半島에서 山東半島를 잇는 해로를 경유하는 노정을 이용하였다. 고려말 대명 사행의 역사적 성격과 사행 경로 등 역사지리적 외연에 대한 사전작업이 이루어짐으로써, 당시 이 공간을 배경으로 지어진 문학작품들에 대한 정밀한 독해가 가능해졌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 정몽주의 시편들을 주 텍스트로 하여 당시 사행 현장의 풍광과 분위기 등을 검토하였다. 결과 明初 요동반도의 여러 사정과 沿路
이 글은 1658년 나선정벌을 배경으로 하는 일련의 기록물을 텍스트로 삼아, 그 서사 공간의 인문지리학적 의의를 규명한 결과이다. 한국의 북방 공간은 엄연한 고대사의 현장이지만,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종래의 인식은 꿈이나 환상에 가까웠다. 나선정벌과 신유의 「북정록」은 오랜 세월 환상의 영역에 있던 북방을, 현실의 영역과 역사의 공간으로 되 돌이키는 역할을 하였다. 1658년의 나선정벌은 여러 기록을 낳았고, 이 기록들은 북방의 지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성격이 다른 여러 텍스트가 형성된 점을 고려하여 논의의 방향을 두 갈래로 잡았다. 하나는 사실 기록인 신유의 「北征錄」을 텍스트로 삼아, 당시 조선군의 이동 경로를 재구하고, 길 위에서 펼쳐진 전 과정에 내포된 서사적 의미를 탐색하는 작업이다. 그 결과 당시 조선군 이동의 전 구간을 통합적으로 재구하였고, 출발에서 귀환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들의 의미를 서사 단위별로 이
『사기・열전』 69편에서 고래로 논란의 가운데 있었던 것은 「伯夷列傳」이다. 이 짧은 글에 대한 논란은 자구의 해석에서부터, 여타의 열전과는 전연 다른 의론 중심의 체제, 인용문과 의문문 사이에 숨겨져 있어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운 사마천의 본의, 그리고 열전 전체의 首篇으로서 지니는 특별한 의의와 기능 등에 이르기까지 그 편폭이 매우 넓다. 아직까지도 「백이열전」의 구성과 주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차원에서 「백이열전」의 형식과 주제를 규명하였다. 첫째, 「백이열전」은 문법적으로 ‘인용문과 의문문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점을 주목, 이를 기준으로 단락을 여섯 개로 나누었다. 둘째, 이러한 단락 구성은 공자의 발언과 윤리적 판단에 대한 여러 의문과 역사가 공자에 대한 확신이라는 주제를 효율적으로 구현한다. 셋째, 열전 전체의 구도에 주목하여, 「화식열전」과의 首尾 호응 관계에서 「백이열전」의 위상과 기능을 해석하였다. 세 가지 차원의 논의를 통해, 「백
이 논문은 13세기 후반에서 19세기 말에 이르는 600여 년 연행의 역사에서, 고려말~元代, 조선전기~明代, 그리고 조선후기~淸初 세 시기에 걸쳐 300년가량 이용된 ‘遼陽-鞍山-海州-牛家庄-三叉河-沙嶺-高平-盤山-廣寧’ 구간을, 인문지리학의 관점에서 검토한 결과이다. 이 구간에서 주요 역참이 있던 곳은 鞍山‧海州‧牛家庄‧沙嶺‧高平‧盤山이었고, 총 거리는 360리(180km 정도)였다. 보통 4박 5일이 소요되는 노정이었지만, 도로 사정 등 때문에 5박6일이나 6박7일이 걸리기도 하였다. 우리 사행은 어떤 길을 오갔고, 沿路의 기후와 풍광은 어떠했으며, 어떤 역사와 풍속이 발견되었으며,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는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자연환경은 들판(遼野)과 바람과 진창이었다. 들판에서는 세계의 물리적 크기를 감지했고, 바람과 진창에서는 행로의 고통을 겪었다. 山川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駐蹕山과 三叉河였다. 주필산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을, 三叉河는 오랜 세월 이어온 북방국가와 중원
이항복(1556-1618)은 사대부 출신 고위 관료로서 계층을 넘나들며 널리 사랑받아온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재야와 민간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오래 세월 전승되어 왔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며, 더더욱 권력이 좌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사회 底流의 관심과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역사인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계층과 시대를 초월하여 오래도록 전승되었다면,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동력과 현실적 기원이 있다는 가설에서 이 글은 출발한다.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야담 중에서 이항복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해학 이야기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격식의 파괴(형식)․약자에 대한 배려와 강자에 대한 저항(내용)을 특징으로 밝혀냈다. 이러한 품격과 깊이야말로 이항복의 해학 이야기를 전승하게 한 동력이다. 다음으로 야담 속 이항복 형상의 기원을 찾기 위해 이항복의 漢詩 10여 수를 검토하였다. 이항복의 시에서는 절망
6세기 『水經注』의 기록 이래 浿水는 평양의 대동강이라는 학설에 별 이견이 없었다. 16세기 이후 이러한 견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몇몇 학자들은 여러 문헌을 근거로, 浿水는 요동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이러한 견해는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에 의해 계승되었고, 해방 이후 몇몇 학자들은 방대한 논거를 통해 이 학설을 더욱 정교하게 입증했다. 浿水의 문제는 고대사의 강역과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매우 뜨거운 주제이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학계의 논의는 이상할 정도로 냉랭하다. 출판시장이나 온라인상에서 ‘浿水’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지만, 이 단어로 검색되는 정기간행물의 학술논문은 5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 이 분야에 있어 지식 형성의 계보와 유통 과정을 추적하기 힘들 정도로 학문적 대화와 지식의 교류가 마비되어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둘째, 앞의 이유와 관련해서 학계가 제공하는 정보가 지식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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