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정우택 교수

Woo Taek Jeong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연구실 소개

정우택 교수의 연구실은 식민지 및 전쟁 시기의 문학과 대중문화, 특히 아리랑, 『백조』 등 문학잡지와 시인들의 정치적·정신적 위상을 중심으로 다루며, 근대 사상과 문예의 상호작용을 탐구합니다. 주로 매체, 인적 네트워크, 시사적 맥락을 통해 문학이 어떻게 정치적 정체성과 사회적 운동으로 기능했는지를 분석합니다. 특히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의 문학적 전환점, 좌익 문학과 반공 프레임의 형성 과정에 깊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식민지 문학전쟁과 문학문학잡지정치적 정체성대중문화사

연구 현황

논문 수
32
총 인용 수
214
최근 5년 논문
7
주요 분야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5개년 연도별 논문 게재 수
7총합
2018
2019
2022
2024
2026
5개년 연도별 피인용 수
9총합
20182019202220242026

주요 논문

15
1
논문|인용수 25·2007
아리랑 노래의 정전화 과정 연구
정우택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로 정착하는 과정, 아리랑의 정전화 과정에는 본조아리랑의 음악적 특성, 노랫말과 후렴의 근대적 의미와 기능, 근대적인 매체와 대중의 형성, 시대 현실의 반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본조아리랑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1926)의 주제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본조아리랑은 기존의 경기자진아리랑을 이어받으면서 바이올린과 서양 악곡을 바탕으로 편곡되었다. 나운규는 당시 창가를 배우고 일본 유행가를 즐겨 듣던 대중들의 음악적 성향에 부합하는, 단순하면서도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조를 영화 주제가로 활용하였다. 본조아리랑을 대표하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라는 노랫말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잡가 아리랑에서 이 노랫말은 유흥의 공간에서 假定된 이별을 환기시킴으로써 만남과 흥을 강화하는 뜻으로 불렸다. 그런데 영화 <아리랑>의 내용과 결합하면서 민족의 보편적인 비극인 ‘생이별’의 현실과 그에 따른 비통한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그

2
논문|인용수 23·2009
『문우』에서 『백조』까지 -매체와 인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정우택

이 논문은 『백조』가 탄생하기까지의 정황을 매체와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살펴보았다. 정백, 홍사용, 박종화 등은 휘문고보 시절 회람잡지 『피는꽃』를 발간하고, 사회에 나와 ‘문우구락부’를 조직하고 문예잡지 『문우』(1920.5)를 발간했다. 지금까지 잡지 『문우』는 이름만 알려져 왔을 뿐이었는데, 이 논문에서 처음으로 그 실체를 소개하게 되었다. 『문우』에는 정백, 홍사용, 박종화, 이서구, 박헌영 등이 글을 발표했다. 박헌영을 제외한 이들은 『문우』 이전에 종합지 『서광』(1919.11 창간)의 편집자 혹은 필자로도 참여하였다. 또 다른 문학청년인 박영희와 나도향은 박종화를 견인하여 문예잡지 『신청년』 2기(4호, 1921.1)를 주도했다. 박영희, 박종화, 노자영 등은 시전문지 『장미촌』(1921.5)의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에 최승일은 박영희, 나도향, 박종화, 현진건 등을 초청하여 더 큰 규모를 갖춘 『백홍(白虹)』이란 잡지를 제안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마침내

3
논문|인용수 19·2012
해방기 박인환 시의 정치적 아우라와 전향의 반향
정우택

시인 박인환은 모더니스트, 댄디스트, 센티멘털리스트 등으로 규정되어 왔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1950년을 전후하여 변화하였다. 1945년 8․15 이후부터 1950년 사이에 씌어진 그의 시는 격렬한 정치성과 사회성, 구체적인 시사적 현실성을 기조로 하고 있다. 그런데 1950년대 그의 시는 페시미즘적이고 감상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이 대조적 변화의 계기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한국전쟁의 비극적 체험의 결과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박인환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이미 <1950년의 만가(輓歌)>라는 시를 발표하였는데, 이 시는 한 시인의 자기모멸과 절망을 주조로 하며, 스스로를 조상(弔喪)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런 죽음의식이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 나타나는데 이는 국가보안법—국민보도연맹—전향—동원 등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그가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전향하기까지의 문학적 궤적을 살펴보았는데, 시 자체의 주제적․미학적 분석보다는 서점 ‘마리서사’와 그 주변, 인

4
논문|인용수 17·2005
『근대사조』의 매체적 성격과 문예사상적 의의
정우택

1916년 1월 일본에서 황석우가 발행한 근대사조는 활자 매체에 머물지 않고, 결여된 정치적 자아를 보충하고 확장하는 사상적인적 네트워크로 기획되었다는 매체적 특성이 있다. 이 잡지는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생성유지시키는 정복 전쟁과 배타적인 충군애국의 국가주의를 반대하고 만민평등 평화주의, 세계주의, 인도주의를 주장하는 글들을 선진사조로 번역소개했다. 이는 당시의 제1차 세계대전과 식민주의를 반대하는 다이쇼데모크라시의 아나키즘적 풍조와 연결되어 있다. 황석우, 최승구(-나경석), 김억, 정태신 등은 근대사조를 통해 1910년대 한국 사회주의(아나키즘)의 인적 계보를 형성하였고, 최승구는 ‘개인’의 혁명을 도모했던 시인이자,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였다. 김억은 개인의 절대 자유를 실현하는 방법으로써 유미주의에 주목하고 이를 삶으로 실천한 오스카 와일드를 소개했다. 또한 김억은 아나키스트의 공식 언어이자, 국제평화주의를 정신으로 하는 에스페란토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김억과 황석우는 개인의

5
논문|인용수 14·2014
‘한하운 시집 사건’(1953)의 의미와 이병철
정우택

1953년 6월 30일 『한하운(韓何雲詩抄)』 재판이 출간되자, 「민족적 미움을 주자―적기가(赤旗歌) 『한하운시초』와 그 배후자」(이정선)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은 시집 『한하운시초』가 공산주의 선전 선동의 기제이고, 작가 한하운은 아바타에 불과하고 이병철이 배후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기사가 여론을 증폭시켜 치안국, 검찰청, 국회까지 개입하게 되고, 이 사건은 휴전 직후 남한 문학장에 반공 냉전 프레임을 조성하고 문단이 재편성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본고는 『한하운시초』 초판(1949년 5월 발행)을 편집하고 발행을 주선한 시인 이병철을 중심에 놓고 ‘한하운 시집 사건’을 추적해 보았다. 해방기 전위시인 이병철은, 1948년 8월 남한단독정부 수립과 그해 12월 국가보안법 공포 이후 법의 바깥에서 지하활동을 전개하며 사회적 타자로 내몰리고 마침내 수배를 받게 되었다. ‘전위시인’ 이병철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을 발견하고, 문둥이와 빨갱이의 공통의 운명을 통해 자기를

6
논문|인용수 13·2014
전시체제기 이용악 시의 위치(position)―『오랑캐꽃』을 중심으로
정우택
한국시학연구

본고는 식민지 전시체제기의 이용악의 위치(position), 그리고 그의 시의 변화 양상과 특성을 살펴보았다. 이용악은 시집 『분수령』(1937)과 『낡은집』(1938)을 일본에서 출간하고 1939년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쓴 시는 삶의 리얼리티에 입각한 굳건한 정신과 당찬 주체가 돋보였다. 그런데 조선에 돌아와서 발표한 시는 내면의 불안과 분노, 공포에 휩싸여서 좌절감을 호소하는 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변화는 전쟁을 문학의 소재와 주제, 마케팅의 자원으로 삼으려는 조선 문단의 기획 속에서 갈등하며 자기 위치를 잡으려는 시적 고투의 반영이다. 또 그의 문학의 주요한 배경이었던 ‘북방 로컬리티’의 성격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유랑하는 식민지민의 고난에 찬 주체성과 연대감, 불온한 정치성 등의 장소였던 ‘북방’이 전쟁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동양평화를 실현하는 병사와 개척자의 성소로 담론화함으로써 이용악은 중요한 시적 장소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문학적 정황 속에서 산출된

7
논문|인용수 13·2009
在滿朝鮮人의 混種的 正體性과 尹東柱
정우택
어문연구(語文硏究)

본고는 尹東柱를 滿洲 移民 3세인 在滿朝鮮人이라는 아이덴티티를 통해 살펴보고자 했다. 滿洲國은 ‘民族協和’와 ‘內鮮一體’ 논리가 충돌하며 착종하는 곳이었다. 윤동주는 그곳에서 混種的인 아이덴티티로 矛盾的인 帝國-植民地 現實을 체험·기억하고, 이로 詩를 썼다. 디아스포라적 아이덴티티가 故鄕 歸還을 향한 苦難의 敍事를 생산해 왔던 데 비해, 윤동주는 北間島라는 歷史-生活 空間을 충족적이고 자기완결적인 共同體로 사유했다는 특성이 있다. 본고는 그의 詩가 滿洲에 대한 體驗과 記憶의 歷史를 바탕으로, 帝國의 同化-排除 논리에 맞서 마이너minor들의 多元主義的 共存을 추구하였다는 점을 밝혔다. 특히 에스니시티로서의 ‘朝鮮人’에 자기를 同一化하던 윤동주가, 엄혹한 ‘新體制’ 국면에서 네이션의 主權者로서 ‘朝鮮’을 상정하고 獨立을 주장할 수 있었던, 그의 思惟와 行動의 動機를 在滿朝鮮人으로서의 正體性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8
논문|인용수 10·2006
황석우의 매체 발간과 사상적 특징
정우택

1910~20년대 황석우는 자유시운동의 선구자로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던 시, 여러 잡지의 발행과 편집을 담당했던 문화기획자였으며 ,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아나키즘 조직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이자 이론가였다 . 따라서 그의 다양한 활동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 의 영역에 한정되었으며 최근 들어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 이 논문에서는 매체의 발간을 중심으로 황석우의 문단 및 사회활동과 매체 발간의 의의를

9
논문|인용수 10·2003
「만만파파식적」의 시인, 김여제
정우택

말로만 전해져 오던 「만만파파식적」이란 시가 외국에서 발굴되면서, 그 작자인 김여제(金輿濟: 1895-1968)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 동안 김여제는 생애도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진 시인으로 남아 있었다. 이에 본고는 우선 김여제의 생애를 재구성함으로써 한국근대시 형성과정의 정황을 살펴보는데 서술의 초점을 맞추었다. 김여제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신문관과 광문회에서 활동하였다. 이어 일본에 유학하여 김억, 현상윤, 최승구 등과 교류하며 근대자유시를 모색하는 한편, 「만만파파식적」을 비롯한 선진적인 자유시를 발표하였다. 귀국하여 3·1운동에 관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신문』에 혁명성과 서정성이 조화를 이룬 다수의 시가를 발표하였다. 상해에서 흥사단에 입단하고 안창호의 권유에 따라 미국으로 유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정체성은 시인에서 교육가로 전환하게 된다. 미국에서도시를 발표하지만, 그 시들은 계몽적 교술시가 주류를 이루었

11
논문|인용수 8·2013
종로의 사상지리와 임화의 ‘네거리’
정우택

이 논문은 종로라는 장소를 통해 시집 현해탄(1938)까지의 임화를 독해하고자한다. 임화는 생의 전환기마다 ‘종로 네거리’에 스스로를 세우고 역사와 운명을 가늠하는 시를 창작했다. 기존의 연구에서, 1920~1930년대의 종로는 청계천 남쪽의 신마찌[新町]‧혼마찌[本町]‧메이지마찌[明治町]에서 배제된 모더니티의 타자적 장소, 또는 제국‧‘내지(內地)’‧식민성에 대항하는 전통적 민족성의 표상으로 인식되었으며, 임화의 ‘종로 네거리’도 이런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설명되었다. 그런데 임화의 ‘종로’는 모더니티나 내셔널리티로만 설명되지 않는 사상지리적 특성을 갖는다. 이 연구에서는, 임화가 민족‧계급‧운동의 공간으로서 종로를 발견하고 표상했다는 기존의 관점과 달리, 종로가 임화의 신체와 시를 생성했다는 관점을 취한다. 소년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임화에게 종로는 시간과 장소, 운동성으로 교직된 구체적 사건들의 총합이었다. 그가 종로 복판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닌 1921~1925년은 한국 근대사

12
논문|인용수 7·2011
서정주 초기문학의 심성 구조
정우택
한국시학연구

지금까지 서정주의 초기시는 보들레르, 니체, 그리이스 육체성 등의 서구문학과 서구사상의 영향 속에서 생성되었고, 그 성격은 ‘관능적 생명력과 신성한 육체성에 대한 열망’·‘에로티시즘’·‘퇴폐성’·‘영원성’ 등으로 규정되어 왔다. 이에 본고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추상적 해석학과 달리, 서정주 문학이 기반하고 있는 실존적 체험과 사회적 상황, 이미지와 감각의 뿌리를 미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이란 <자화상>의 표상에 내재된 심성 구조를 해명하기 위해 ‘손톱’이란 시어에 주목하였다. 맑고 깨끗한 손톱이 표상하는 근대적·이상적 미와 까만 손톱이 표상하는 천하고 열등한 자의식이 대칭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깨끗한 손톱의 도시 여자를 사랑했다가 실연당한 그는 그 격절감을 「문둥이」라는 시를 통해 형상화하였다. 당시 문둥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반사회적’ ‘비정상인’으로 관리되고 격리되었다. 징그러운 문둥이나 화사를 자기와 동일시하며 서정주는 근대적 문명과

13
논문|인용수 7·2015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이육사, 그리고
정우택

이 글에서는 우선 이육사의 호 중에서 ‘戮史(육사)’가 사용된 경우를 확인하고 ‘戮史(육사)’의 전복적 어의와 ‘陸史(육사)’의 혁명적 지향을 연동시켜 이육사의 새로운 면모와 활동 영역을 살펴보았다. ‘戮史(육사)’라는 필명으로 글을 발표한 대중의 매체 주체와 성격, 발표 시점 등을 통해 이육사의 사상적 좌표를 측정하였다. 육사가 대중에 발표한 글을 통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국내 네트워크, 카프 맹원 이갑기(李甲基)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한편 이육사가 「신문조서」에서 진술한 바, 중국에 가서야 윤세주(尹世冑)의 권유를 받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였다고 피동적으로 진술한 것에 대해, 사실은 육사가 국내에서중국행을 도모할 때부터 이미 윤세주-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의 접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이육사가 일제 말 중국행을 감행하여 체포되고 옥사하게 되는 사태의 내적 동인과 정황을그의 시들을 통해 살펴보았다. 특히 그의 정체성인 '육사'의 실현과 <꽃>

14
논문|인용수 6·2006
근대적 서정의 형성과 이별의 양상
정우택

이별은 예로부터 문학예술의 중요한 제재였다. 이별의 양상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본고에서는 이별을 사별(死別)과 생이별(生離別), 그리고 심미적으로 법식화된 이별로 크게 나누어 보고, 그것이 문학사 속에서 어떠한 층위로 존재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전근대시대 생활공동체에서 이별은 주로 사별을 의미했는데, 근대적 문물과 제도로 인해 생이별이 발생하게 되는 양상을 정선아라리를 통해 살펴보았다. 고전시가에서 만남과 이별을 흥(興)과 예(藝 또는 禮)의 수준으로 심미화양식화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특수계층인 기녀(妓女)의 역할을 지적하였다. 근대 이전에 제한적으로 존재해 왔던 생이별이 근대와 함께 계층과 성별, 연령, 지역을 초월하여 전면화 되었으며, 생이별로 인한 정서적 고통이 근대적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초기 근대시는 이별을 양식화하고 심미화하는 과정을 통해 그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애국계몽기의 시가, 주요한, 김소월, 한용운 등의 시에서 이별을 근

15
논문|인용수 5·2017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본과 재판본의 사이
정우택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초판본은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초판본 시집 출간에 관여한 사람들은 정지용, 강처중, 유영, 정병욱, 김삼불 등이었다. 정지용은 윤동주를 통해 ‘8.15 이후 조선의 운명에 해당한 새로운 민족시’의 방향과 가능성을 타진했다. 정지용을 비롯한 초판본 편집·간행 참여자들은 윤동주와 시집을 ‘시와 조선과 인민’을 상상하는 텍스트로 기억하고자 했다. 이들은 인민이 주체가 되는 자주적 민주재건을 통한 남북통일정부를 지향하는 노선에 서 있었고, 그런 위치에서 윤동주를 상상했다. 단독정부 수립 후 이들은 배제되거나 전향하거나 월북했다. 1953년, 정음사는 『한하운 시초』 재판본을 출간했다가 공산간첩의 문화공작이라는 필화사건을 겪었고, 강처중이 배후로 언급된 ‘정국은 간첩단 사건’이 터져 온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문화빨치산’ ‘문화계 간첩’ ‘출몰’ ‘침투’ ‘색출’ ‘처단’이라는 냉전적 언어가 난무했다. 한국전쟁 종전 전후 한국

정우택 교수의 연구를 Nubint에서 더 깊이 살펴보세요

이 연구실의 논문을 앱에서 열어 AI와 함께 읽고, 핵심을 요약하고, 내 글에 인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