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승 교수
Yuseung Jang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연구실 소개
장유승 교수의 연구실은 전통 문집의 편찬과 전승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보의 누적성과 왜곡을 철저히 분석하며, 역사적 자료의 신뢰성과 문헌의 진위를 고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농포집』, 『심산유고』, 『합강집』 등 주요 문학집과 가문 기록을 대상으로 한 서지학적·비판적 검증을 통해 후대에 추가된 내용의 진위를 밝히고, 이를 통해 인물 서사와 문학사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한다. 또한 민간 전통 작명서의 유래와 점술 체계를 분석함으로써, 전통 지식의 실체와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연구 현황
연구 성과 추이
표시된 성과는 수집된 데이터 기준으로 산출되며,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요 논문
13영조 어제는 현전하는 국왕 어제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그 현황은 선행연구에 힘입어 어느 정도 밝혀졌으나, 어떠한 경위를 거쳐 편찬되었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본고는 『승정원일기』의 어제 관련 기사를 통해 영조 어제 관련 문헌의 편찬 경위를 밝혔다. 영조는 열성 어제 어필 정리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어제 창작을 시작했으며, 자신의 어제를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1743년이다. 어제편차인을 임명하여 그간 창작한 어제를 수집하게 하고, 이후 창작한 어제의 정리와 교열 역시 담당케 했다. 1758년 『열성어제』에 수록할 어제의 정리를 마치고, 이후 창작한 어제는 일정한 시기별로 별도의 문헌으로 엮었다. 영조는 초창기 어제에서 숙종의 고사 및 시문을 자주 인용하여 정통성을 강조하는 한편, 정치 행위의 준거로 삼았다. 어제를 신료 및 백성과의 소통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모습도 보인다. 반면 만년의 어제는 과거를 회상하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방향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논문은 필사본 『夢梧集』 발굴 이후로 본격화된 김종수 연구에 일조하는 의미에서 산견되는 그의 저술을 정리하는 한편, 만년작을 중심으로 그의 시를 검토함으로써 선행연구의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고자 한다. 김종수는 정조 연간에 정승을 역임하며 외척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고 이른바 청류 정치를 주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여 종 이상의 저술을 남겼으며, 그 대부분은 국왕의 명 또는 국정 운영의 필요에 의해 편찬한 것이었다. 김종수는 300편 이상의 시를 남겼으며, 그중 대부분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지은 것으로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공무가 바빠지거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질수록 시에 기울인 관심은 저조해졌다. 은거 지향의 의지가 뚜렷한 초년작과 달리, 그의 만년작에서는 출사를 후회하거나 은거를 지향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활자본 『몽오집』은 근대적 문학관에 따라 선별한 시문을 엮은 것이며, 관각문인으로서 김종수의 진면목은 필사본 『몽오집』에서 확인
『象山三昧』는 李喆煥(1722∼1779)이 1753년 10월 9일부터 이듬해 1월 29일까지 충남 예산 가야산 일대를 여행하고 남긴 기록이다. 가야산은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던 불교의 성지로, 이 일대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이 책은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이로 인해 2종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으나 이 책에 언급된 지명에 대한 고증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논문은 이철환이 경기 안산을 출발하여 충남 덕산에 도착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가야산 일대를 여행한 경로를 상세히 재구하였다. 아울러 충남 덕산 일대를 다룬 여러 문헌을 활용하여 『상산삼매』에 언급된 가야산 일대의 지명을 고증하고, 현장 답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상산삼매』에 언급된 가야산의 여러 봉우리, 사찰 및 암자, 마을과 유적 등의 현재 위치를 추정하였다. 이 논문은 『상산삼매』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나는 지명을 고증하는 방법을 예시하였다.
이 논문의 목적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작명법의 유래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현전하는 민간 전통 작명서의 구성과 내용을 고찰했다. 현대 작명법은 한자의 획수를 중시하며, 한자의 획수를 계산하여 길흉을 판단하는 점술은 邵雍의 저작으로 알려진 『梅花易數』에서 유래한다. 한자의 획수를 『周易』의 卦象으로 변환하여 길흉을 판단하는 점술이다. 이 점술은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유행했다. 『作名秘要』․『作名要訣』․『解名冊』 등 현전하는 민간 전통 작명서 역시 이 점술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이와 유사한 작명서를 작명과 개명에 이용한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민간 전통 작명서는 『주역』의 권위에 기대고 있지만 사실상 『주역』과는 거리가 멀다. 『주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도 이용 가능한 단순한 문헌이다. 민간 전통 작명서의 저자 역시 수준 높은 지식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작명서는 18세기 이후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에도 상당한 인기
심산 생가 신자료는 2023년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가 심산 김창숙 후손에게 기탁받은 고본 9책과 문서 219점 379장이다. 지금까지 일부 연구자가 이용하였으나 그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심산 생가 신자료는 『심산유고』의 저본으로 추정되는 고본 및 고본의 초고로 추정되는 문서 형태의 원고이다. 이중에는 이승만과 자유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여 『심산유고』 편찬 과정에서 산삭된 한시, 그리고 애초에 『심산유고』 수록 대상에서 배제된 해방 이후의 국한문혼용체 저술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논문은 심산 생가 신자료의 현황을 개관하고, 새로 발굴한 심산의 한시 21제의 일부를 고찰하였다. 『심산유고』에 수록되지 못한 저술의 수습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본고의 논의를 바탕으로 고본과 문서를 『심산유고』와 정밀히 대조하여 누락된 글을 찾아내고, 창작 시기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해방 이후 심산이 남긴 국한문혼용체 저술은 그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므로 정리가 시급하다.
문집은 저자가 평생에 걸쳐 창작한 저술의 집합이며, 여기에 저자 사후에 제작되는 묘도문자 및 추숭과 현양을 위해 생산된 기록이 추가된다. 상당수의 문집은 수백 년에 걸쳐 누적된 기록의 집합이며, 기록이 누적되는 과정에서 후인의 창작과 과장이 개입하기 쉽다. 본고는 이를 ‘누적성’이라 명명한다. 본고는 박대덕의 묘도문자를 창작시기순으로 배열하여 생애 서술의 변화 양상을 살피고, 『합강집』 수록 시문을 타 문헌과 교차 검증하여 그 신빙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상당 부분이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는 비단 『합강집』에 국한된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 논문은 문헌이 전승, 누적되는 과정에서 왜곡될 가능성을 도외시한 채 문집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연구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추가, 변형된 내용이 어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하는 것을 향후 문집 연구의 과제로 제안한다.
지난 60년간 고전번역사업은 한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산업 구조 및 인구 구조 변화에 따라 향후 한국학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한국학의 소외는 고전번역사업의 소외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학은 기존 개념과 범주를 재정의함으로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고전번역사업 역시 한국학의 쇄신에 동참하는 한편, 한국학의 범주를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고전번역사업의 쇄신은 고전, 번역, 사업의 개념과 범주를 재정의하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 우선 분과 학문의 논리를 벗어나 문학, 사학, 철학에 치우친 사업 대상을 여러 분야로 다양화하고, 문헌의 국적, 형태, 시기, 가치의 경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업과 교육의 연계를 통해 고전번역 인력 및 한국학 연구자 양성에 기여하는 것도 고전번역사업의 해묵은 과제이다. 이것이 한국학의 경계 허물기에 부응하는 고전번역사업의 경계 허물기이다.
이 논문은 申光洙 후손가 소장자료 110점을 御筆과 試券, 畫帖과 書帖, 詩稿와 簡札, 稿本, 古文書 5종으로 분류하고, 그 서지적 특성과 편찬경위를 고찰한 것이다. 특기할 만한 자료로는 英祖 御筆 『御書四皓閣帖』, 신광수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登岳陽樓歎關山戎馬> 試券, 그리고 正祖의 御批와 御考가 기재된 申光河의 <獻三千年結子蟠桃五枚>와 <城市全圖>를 들 수 있다. 書畫로는 신광수 필 『高士觀瀑圖』, 許泌, 姜世晃, 崔北 3인의 채색화를 장첩한 『臥遊帖』, 신광수의 증조 申潝의 書帖 『察訪公筆帖』, 申夔相의 義禁府 契帖 3점을 주목할 만하다. 신광수가 인물들을 비롯해 蔡濟恭, 丁範祖, 李獻慶, 睦萬中 등 남인 문인들의 낱장 詩稿는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것도 많고, 신광하의 <君不見震澤先生歌> 시고에는 채제공의 비평이 남아 있다. 이밖에 신광수의 『西關錄』, 『浮海錄』을 비롯한 다수의 稿本은 『석북집』 편찬에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고에서 소개한 자료들은 신광수 이래 4대에 걸
본고는 『농포집』의 판본을 비교 검토하여 정문부의 생애에 관한 사실과 시문이 누적되는 양상을 확인하고, 후대에 추가된 부분의 진위를 검토하였다. 『농포집 』은 1708년부터 1970년까지 여섯 차례 간행을 거듭하면서 생평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다량의 시문이 추가되었다. 특히 1890년 편찬된 연보에는 이전에 없던 관력과 교유가 대거 추가되었는데, 여러 문헌을 통해 고증한 결과 이는 사실과 다르다. 추가된 시문의 진위도 의심스럽다. 본고는 문헌의 누적성이 인물의 생애와 문학 연구에 중대한 오류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본고의 논의는 비단 정문부와 『농포집 』 연구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집을 활용한 연구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본고는 『흠서박론』의 체재와 내용을 검토하여 『흠흠신서』와의 관계를 해명하고, 이 책에 나타나는 『흠흠신서』 비판의 주안점을 개략적으로 살핀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 책의 존재를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렀고, 아직 이 책의 구성과 내용에 대한 개략적인 검토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흠서박론』의 편찬의도는 일차적으로 『흠흠신서』에 대한 비판이며, 이 과정에서 조선 형률의 전반적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심대윤이 지적한 조선 형률의 문제점은 강상 윤리를 중시하지 않는 점, 사적 제재를 용납하는 점, 반좌율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는 점, 결과 책임을 중시하는 점, 수범과 종범을 구분하는 점이다. 심대윤의 『흠흠신서』 비판은 이 다섯 가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심대윤은 상고주의를 표방하지만 그가 거론하는 ‘선왕의 법’은 자신의 입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명분에 가깝다. 그의 형률론은 단순한 복고주의로 환원하기 어려우며, 전근대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가 착종되어 있다. 그의 형률론을 전근대적이라고
이 논문은 펜데믹 이후 인구구조와 산업구조의 변화,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 확산 등으로 규정되는 뉴 노멀 시대에 고전번역사업의 역할을 언어와 매체, 그리고 이를 둘러싼 환경 변화의 세 측면에서 진단하였다. 언어 변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한자, 한문의 위상 하락과 고전문학 교육의 축소이다. 고전번역사업은 재래의 언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기존의 재번역 논의는 번역 오류 수정과 학술성 제고에 치우쳐 있다. 고전번역사업은 변화한 언어를 새로운 표준으로 상정하여 대중을 독자로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국민 고전 소양을 제고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매체 변화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디지털 전환이다. 고전번역사업의 결과물 수용방식은 종이책에서 온라인 DB로 이동하였다. 디지털 전환은 유통 방법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컨텐츠의 생산과 소비 방식을 변화시켰다. 수요자 입장을 고려하여 번역 대상을 선정하고, 저변을 넓힐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창의적 발상이 나올 수 있도록 자율성과 다
이 논문은 전남 영광에 세거한 전주이씨 병사공 종가의 필사본 문집과 李龍純(1779~1849)의 시집 穆如淸風을 중심으로, 19세기 영광 향촌사족의 일상을 재구한 것이다. 우선 병사공 종가 기탁 필사본 문집의 현황을 개관하고, 문집 필사 작업이 이용순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을 밝혔다. 이용순은 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선조들의 시를 정리하는 한편, 자신의 일상을 詩化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 결과, 목여청풍 12책에 수록된 4천여 편의 시에서는 세 가지 경향이 두드러진다. 첫째, 대동계를 통해 지역사회 운영에 관여하고, 고용 노동에 의지하여 토지를 경영한 실상이 드러난다. 둘째, 법성포의 조운 활동 및 해산물의 생산과 거래 현장을 묘사하였다. 셋째, 일상의 사물과 민간의 풍속, 여성 및 하층민 등 소외된 계층이 자주 등장한다. 목여청풍 수록 한시에 나타나는 이같은 경향은 19세기 영광 지역의 사회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향촌사족의 저술은 문학적 성취보다 생활사를 증언하는 자료
수도집경시는 수도 전역을 배경으로 창작된 집경시로, 수도의 위상과 도시적 특성을 반영한다. 본고는 조선 전기 한양의 수도집경시 「신도팔경」과 「한도십영」, 그리고 중국의 「북경팔경시」를 비교하며 그 관계를 고찰하였다. 「신도팔경」은 1398년 정도전이 태조의 명에 따라 창작하였으며, 한양 천도 직후 새로운 수도의 위용과 번영을 구가하려는 목적이 뚜렷하다. 이후 서거정을 비롯한 관각문인들은 「신도팔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국가의 태평과 사대부의 역할을 보충하여 1479년경 「한도십영」을 창작하였다. 「한도십영」은 「신도팔경」처럼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수도의 경관을 배경으로 한가로운 정취를 즐기는 사대부의 모습이 정치적 안정의 산물임을 시사하였다. 『북경팔경시집』은 「한도십영」의 창작에 앞서 조선에 유입, 간행되었다. 그러나 조선 문인들에게 「북경팔경시」의 존재를 널리 알린 문헌은 『대명일통지』이다. 「한도십영」의 창작에 참여한 이들 중 상당수가 『대명일통지』를
장유승 교수의 연구를 Nubint에서 더 깊이 살펴보세요
이 연구실의 논문을 앱에서 열어 AI와 함께 읽고, 핵심을 요약하고, 내 글에 인용하세요.